[천자 칼럼] 서희의 '보이지 않는 칼'
‘외교 달인’ 서희(徐熙)가 태어난 942년, 고려는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 보내고 낙타 50마리를 굶어죽게 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한 거란에 강경한 노선을 보여줬다. 938년 ‘요(遼)’로 이름을 바꾼 거란은 당시 떠오르는 강국이었다.

서희가 태어난 18년 뒤인 960년 중국에 송나라가 들어섰다. 12년 후 서희는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됐다. 한동안 관계 두절 상태였던 송나라에서는 고려 사신을 냉대했다. 이에 서희가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한 것은 여진과 거란이 육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송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서희가 51세 때인 993년에는 거란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와 항복을 요구했다. 조정은 무조건 투항파와 항전파, 북쪽 땅을 떼주고 화친하자는 파로 나뉘었다. 이때 서희가 나서 소손녕과 담판을 짓고 철군 약속을 받아냈다. 고구려 옛땅인 강동 6주까지 되찾았다.

서희는 국제 정세를 면밀하게 분석한 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꿰뚫었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 침공을 앞두고 고려의 배후 기습을 염려했다. 이런 속내를 간파한 서희는 송나라와의 단교를 약속하며 거란을 안심시켰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고려 조정 내 친송파(親宋派)가 강하게 반대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소손녕에게 내비치며 이들을 설득할 ‘선물’을 요구했다. 그게 강동 6주였다. “당신들과 통교하지 못한 것은 여진이 막고 있기 때문이니, 그 땅을 우리가 회복하면 국교가 통할 것이다.”

이후 송나라와 단교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상대의 체면을 살려줬다. 거란과 수교한 경위를 알리면서 “군사적 압박 때문에 부득이했으며, 앞으로 힘을 기르면 송과 손잡고 거란을 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민간 교류는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이처럼 그는 상대의 의중을 명확히 파악해 실리주의 외교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가 공허한 명분론을 앞세우며 마구 칼을 휘둘렀다면 어땠을까. 탁월한 국제감각과 외교 협상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군을 돌려보내며 옛땅까지 찾아온 그의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의 경제 보복 같은 비극이 초래되기 전 서희처럼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외교 전략가가 우리에겐 왜 없었을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