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만 보던 정부, 酒稅개편 또 연기…종량세 도입 없던 일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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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재정부가 이달 초로 계획한 주세법 개편안 발표를 또다시 미뤘다. 현행 종가세(從價稅: 제조원가에 과세) 체계를 종량세(從量稅: 알코올 도수 및 술 용량에 따라 과세)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기는 주종·업체 간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재부가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주세법 개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병규 기재부 세제실장은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맥주업계는 대체로 종량세 도입에 찬성하지만 소주·약주·과실주 업체들은 불확실성이 커진다고 우려한다”며 “업체 간 이견 조율과 실무 검토에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최근 주요 맥주·소주업체의 가격 인상을 두고 ‘주류세 개편으로 술값이 오른 것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가 생긴 것도 발표 시점을 늦추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그는 ‘종량세 도입을 보류 또는 취소할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현 단계에서 말하기 어렵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업계 관계자는 “기재부가 종량세를 도입해도 술값이 오르지 않고 모든 주종이 손해 보지 않도록 하려다 보니 스텝이 꼬인 것”이라고 말했다.
"주세 개편 때문에 술값 오른다"…여론 반발 의식하다 혼란만 키웠다
주류업계의 이해관계와 여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정부가 결국 주세(酒稅) 개편안 공개를 연기하기로 했다. 기획재정부는 7일 연기 이유로 ‘주류업계 간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종량세가 도입되면 국산 맥주와 위스키, 화요, 안동소주, 고급 와인 등에 붙는 세금은 줄어드는 반면 수입 맥주, 소주, 복분자주 등은 상대적으로 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맥주 및 소주업계 1위 업체들이 일제히 가격을 올린 데다 2~3위 업체들이 인상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발표 연기에 영향을 미쳤다. “주세법 개편으로 가격이 인상될 것이란 국민적 오해가 생겼다”(김병규 기재부 세제실장)는 이유로 주세법 개편안은 다시 미궁 속에 빠져들었다. 오비는 ‘환영’, 하이트·롯데는 ‘묵묵부답’
지난해 종량세 전환 논의에 불을 붙인 건 국내 맥주업계였다. 오비맥주와 중소 수제맥주 업체들이 국세청에 “수입 맥주에 비해 국산 맥주가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건의한 게 시발점이 됐다. 현재 국산 맥주 과세표준(세금 부과 기준이 되는 가격)은 ‘제조원가+판매관리비+이윤’이다. 수입 맥주는 ‘수입 신고가(관세 포함)’다. 국내에서 발생한 판매관리비와 이윤에 대해선 세금을 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생산한 맥주에 더 많은 세금이 붙는다. 종량세로 바뀌면 국산과 수입 맥주 똑같이 ‘L당 OOO원’으로 세금을 내는 만큼 역차별 논란이 사라진다.
하지만 국산 맥주업체가 모두 종량세 전환에 찬성하는 건 아니다. 맥주만 생산하는 오비맥주는 종량세 도입에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지만, 국내 1~2위 소주 브랜드를 거느린 하이트진로(참이슬)와 롯데주류(처음처럼)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기재부는 “종량세로 전환해도 소주에 붙는 세금은 올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위스키 등 다른 증류주 가격이 떨어지면 소주의 상대가격이 오르는 셈이 된다.
소주와 위스키, 화요 등은 증류주 카테고리에 함께 묶여 있기 때문에 세계무역기구(WTO) 기준에 따라 같은 기준으로 과세해야 한다. 예컨대 ‘증류주는 알코올 도수 15도를 기준으로 500원을 과세하고, 1도가 오를 때마다 100원씩 추가한다’는 식이어야 한다. 소주 가격을 현행대로 유지하면 위스키 화요 등 고도주 가격이 떨어지는 구조다. 업계 관계자는 “위스키와 화요 가격이 대폭 떨어지면 소주시장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며 “지방 소주업체들이 종량세 전환에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주세 올릴 때마다 세법 고쳐야
기재부가 종량세 도입을 주저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술값이 오르면 세금도 자동적으로 오르는 종가세와 달리 종량세는 ‘L당 OOO원’으로 세금이 고정되기 때문에 주세를 올리려면 그때마다 세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량세 방식에서 세금을 올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담뱃세가 그랬다. 정부는 종량세인 담배소비세를 2015년 641원에서 1007원으로 인상했다. 세금 인상분 등이 반영돼 담배 한 갑 가격이 2500원에서 4500원으로 뛰자 소비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주세를 종량세로 바꾸면 세금을 올릴 때마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다. 소비자 반발이 두려워 세금을 올리지 않으면 매년 물가상승분만큼 실질 세수를 덜 걷게 된다.
기재부가 맥주만 종량세로 우선 전환하지 못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맥주만 종량세로 바꾸고 소주는 종가세로 놔두면 소주는 가격 인상에 따라 세금이 늘어나지만 맥주는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법을 바꾸지 않는 한 세금은 ‘L당 835원’(권성동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안) 그대로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만큼 기재부가 주세 개편안 발표 시점을 늦출수록 국회 통과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라며 “종량세 도입으로 손해를 볼 업체는 물론 값이 오르는 주종을 선호하는 애주가들 반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상헌/이태훈/김보라 기자 ohyeah@hankyung.com
김병규 기재부 세제실장은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맥주업계는 대체로 종량세 도입에 찬성하지만 소주·약주·과실주 업체들은 불확실성이 커진다고 우려한다”며 “업체 간 이견 조율과 실무 검토에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최근 주요 맥주·소주업체의 가격 인상을 두고 ‘주류세 개편으로 술값이 오른 것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가 생긴 것도 발표 시점을 늦추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그는 ‘종량세 도입을 보류 또는 취소할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현 단계에서 말하기 어렵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업계 관계자는 “기재부가 종량세를 도입해도 술값이 오르지 않고 모든 주종이 손해 보지 않도록 하려다 보니 스텝이 꼬인 것”이라고 말했다.
"주세 개편 때문에 술값 오른다"…여론 반발 의식하다 혼란만 키웠다
주류업계의 이해관계와 여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정부가 결국 주세(酒稅) 개편안 공개를 연기하기로 했다. 기획재정부는 7일 연기 이유로 ‘주류업계 간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종량세가 도입되면 국산 맥주와 위스키, 화요, 안동소주, 고급 와인 등에 붙는 세금은 줄어드는 반면 수입 맥주, 소주, 복분자주 등은 상대적으로 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맥주 및 소주업계 1위 업체들이 일제히 가격을 올린 데다 2~3위 업체들이 인상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발표 연기에 영향을 미쳤다. “주세법 개편으로 가격이 인상될 것이란 국민적 오해가 생겼다”(김병규 기재부 세제실장)는 이유로 주세법 개편안은 다시 미궁 속에 빠져들었다. 오비는 ‘환영’, 하이트·롯데는 ‘묵묵부답’
지난해 종량세 전환 논의에 불을 붙인 건 국내 맥주업계였다. 오비맥주와 중소 수제맥주 업체들이 국세청에 “수입 맥주에 비해 국산 맥주가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건의한 게 시발점이 됐다. 현재 국산 맥주 과세표준(세금 부과 기준이 되는 가격)은 ‘제조원가+판매관리비+이윤’이다. 수입 맥주는 ‘수입 신고가(관세 포함)’다. 국내에서 발생한 판매관리비와 이윤에 대해선 세금을 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생산한 맥주에 더 많은 세금이 붙는다. 종량세로 바뀌면 국산과 수입 맥주 똑같이 ‘L당 OOO원’으로 세금을 내는 만큼 역차별 논란이 사라진다.
하지만 국산 맥주업체가 모두 종량세 전환에 찬성하는 건 아니다. 맥주만 생산하는 오비맥주는 종량세 도입에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지만, 국내 1~2위 소주 브랜드를 거느린 하이트진로(참이슬)와 롯데주류(처음처럼)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기재부는 “종량세로 전환해도 소주에 붙는 세금은 올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위스키 등 다른 증류주 가격이 떨어지면 소주의 상대가격이 오르는 셈이 된다.
소주와 위스키, 화요 등은 증류주 카테고리에 함께 묶여 있기 때문에 세계무역기구(WTO) 기준에 따라 같은 기준으로 과세해야 한다. 예컨대 ‘증류주는 알코올 도수 15도를 기준으로 500원을 과세하고, 1도가 오를 때마다 100원씩 추가한다’는 식이어야 한다. 소주 가격을 현행대로 유지하면 위스키 화요 등 고도주 가격이 떨어지는 구조다. 업계 관계자는 “위스키와 화요 가격이 대폭 떨어지면 소주시장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며 “지방 소주업체들이 종량세 전환에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주세 올릴 때마다 세법 고쳐야
기재부가 종량세 도입을 주저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술값이 오르면 세금도 자동적으로 오르는 종가세와 달리 종량세는 ‘L당 OOO원’으로 세금이 고정되기 때문에 주세를 올리려면 그때마다 세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량세 방식에서 세금을 올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담뱃세가 그랬다. 정부는 종량세인 담배소비세를 2015년 641원에서 1007원으로 인상했다. 세금 인상분 등이 반영돼 담배 한 갑 가격이 2500원에서 4500원으로 뛰자 소비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주세를 종량세로 바꾸면 세금을 올릴 때마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다. 소비자 반발이 두려워 세금을 올리지 않으면 매년 물가상승분만큼 실질 세수를 덜 걷게 된다.
기재부가 맥주만 종량세로 우선 전환하지 못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맥주만 종량세로 바꾸고 소주는 종가세로 놔두면 소주는 가격 인상에 따라 세금이 늘어나지만 맥주는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법을 바꾸지 않는 한 세금은 ‘L당 835원’(권성동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안) 그대로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만큼 기재부가 주세 개편안 발표 시점을 늦출수록 국회 통과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라며 “종량세 도입으로 손해를 볼 업체는 물론 값이 오르는 주종을 선호하는 애주가들 반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상헌/이태훈/김보라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