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밀소주·밀맥주
소주(燒酒)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 충렬왕 때다. 고려를 지배하던 몽골군을 통해서였다. 곡물 또는 과일 발효액을 증류시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만드는 증류식 소주였다. 증류식 소주는 기원전 3000년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진 뒤 아라비아 지역에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을 점령한 몽골군은 증류식 소주를 원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도 들여왔다.

아라비아어로 아락(arag)인 소주가 평안북도에서는 아랑주, 황해도 개성에서는 아락주라고 불리는 것에서도 전래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몽골군 주둔지였던 개성과 경북 안동, 제주도에서 증류식 소주 제조법이 발달했다.

조선시대에 소주는 고급술로 인기가 있었다. 《단종실록》에는 문종이 승하한 뒤 상주 역할을 하느라 몸이 허약해진 단종이 소주를 마셔 기운을 차렸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에는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져 쌀 소비가 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성종 21년(1490년) 사간(司諫) 조효동은 “세종 때는 사대부 집에서 소주를 구하기 힘들었는데, 요즈음은 보통의 연회 때도 소주를 사용하고 있어 비용이 많이 드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왕에게 진언하기도 했다.

증류식 소주의 주요 원료는 수수, 찹쌀, 멥쌀, 좁쌀, 옥수수, 보리 등이다. 일부 지방에선 밀을 누룩과 섞기도 했다. 조선 현종 11년(1670년) 정부인(貞夫人: 정2품 및 종2품 문·무관의 처) 안동 장씨가 쓴 조리서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엔 밀소주 제조법이 기록돼 있다. “밀 한 말을 깨끗이 씻어 무르게 찌고 누룩 다섯 되를 섞어 찧는다. 냉수 한 동이 부어서 저어 두었다가 닷새 동안 발효시킨다….”

1965년 식량 자원 확보를 위한 정부의 정책에 따라 내수용 증류식 소주 생산은 금지됐다(1988년 다시 허용). 대신 고구마 타피오카(열대작물인 카사바의 뿌리에서 채취한 식용 녹말) 등을 주요 원료로 하는 희석식 소주가 등장했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 과정에서 알코올에 물을 섞어 만드는 것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정부와 관련 업계는 지난해 생산한 국산 밀 재고분 1만t을 소주 원료로 사용하기로 했다. 밀 자급률이 1.8%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가 밀이 남아도는 것은 수입 밀에 비해 값이 4배가량 비싸기 때문이다. 밀로 만든 소주맛은 어떨까. 유럽에선 보리가 아닌, 밀로 만든 맥주도 인기를 끌고 있다. 흔히 쓰이는 재료인 보리로 만든 맥주는 텁텁한 맛이 있는 반면, 밀맥주는 목 넘김이 좋고 상큼한 맛 때문에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다. 밀소주 등장은 그 맛이 어떻든, 고를 수 있는 술 메뉴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애주가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