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나폴레옹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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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프랑스 파리의 미로와 같은 골목과 하수구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다. 혁명의 시대였던 당시 좁은 골목에는 수시로 바리케이드를 두고 공방이 벌어졌고 악취 나는 하수구는 전염병의 온상이었다. 주인공 장발장이 딸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를 구하고,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던 예포닌이 죽음을 맞은 배경은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 때였다.
2월 혁명을 계기로 제2공화정이 열리면서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영웅을 갈망하던 대중의 75% 지지를 얻어 당선된 인물은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1808~1873년)이었다. 그는 4년 단임인 대통령에 만족하지 못해 1851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듬해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로 즉위한다.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이자 마지막 군주라는 나폴레옹 3세다.
재위기간(1852~1871년) 중 나폴레옹 3세만큼 명암이 엇갈리는 군주도 드물다. 크림전쟁(1854년)에서 러시아를 밀어냈고 서아프리카를 장악했다. 아시아로 눈을 돌려 1858년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1860년 2차 아편전쟁으로 중국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멕시코 원정(1861~67년)에 실패하고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1870년)에서 포로로 잡히는 치욕도 겪었다. 한국과도 악연이 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다. 이때 외규장각 도서 등이 대거 약탈됐다.
나폴레옹 3세의 업적은 군사적 성과보다 파리 도시정비, 철도망 건설 등 근대화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황제의 명을 받은 오스망 남작(당시 파리시장)은 폭 1m 남짓한 좁은 골목과 어지러운 주택을 방사형 간선도로와 정연하게 늘어선 건물로 정비했다. 샹젤리제 거리, 파리오페라극장 등이 이때 작품이다. ‘다시는 바리케이드를 안 보겠다’는 정치적 의도로 시작한 도시정비 덕에 오늘날 파리가 세계적인 예술과 관광의 도시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 측의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이 안철수 원장을 “루이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해 논란이다.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위해 노동자 소농민계급에 붙고, 어떤 때는 귀족계급에 붙어 20년을 집권했다는 것이다. 안 원장 측은 “그런 발언은 두려움의 표현이고 낡은 정치의 표본”이라고 반박했다.
나폴레옹 3세는 우파 후보로 대통령이 됐지만 대중의 분노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켰고 황제가 돼선 인기에 영합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동안 안 원장이 정책이든 검증이든 보여준 게 없으니 대통령감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150여년 전 프랑스 군주가 머나먼 한국 정치판에서 회자되는 것도 우습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2월 혁명을 계기로 제2공화정이 열리면서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영웅을 갈망하던 대중의 75% 지지를 얻어 당선된 인물은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1808~1873년)이었다. 그는 4년 단임인 대통령에 만족하지 못해 1851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듬해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로 즉위한다.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이자 마지막 군주라는 나폴레옹 3세다.
재위기간(1852~1871년) 중 나폴레옹 3세만큼 명암이 엇갈리는 군주도 드물다. 크림전쟁(1854년)에서 러시아를 밀어냈고 서아프리카를 장악했다. 아시아로 눈을 돌려 1858년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1860년 2차 아편전쟁으로 중국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멕시코 원정(1861~67년)에 실패하고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1870년)에서 포로로 잡히는 치욕도 겪었다. 한국과도 악연이 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다. 이때 외규장각 도서 등이 대거 약탈됐다.
나폴레옹 3세의 업적은 군사적 성과보다 파리 도시정비, 철도망 건설 등 근대화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황제의 명을 받은 오스망 남작(당시 파리시장)은 폭 1m 남짓한 좁은 골목과 어지러운 주택을 방사형 간선도로와 정연하게 늘어선 건물로 정비했다. 샹젤리제 거리, 파리오페라극장 등이 이때 작품이다. ‘다시는 바리케이드를 안 보겠다’는 정치적 의도로 시작한 도시정비 덕에 오늘날 파리가 세계적인 예술과 관광의 도시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 측의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이 안철수 원장을 “루이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해 논란이다.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위해 노동자 소농민계급에 붙고, 어떤 때는 귀족계급에 붙어 20년을 집권했다는 것이다. 안 원장 측은 “그런 발언은 두려움의 표현이고 낡은 정치의 표본”이라고 반박했다.
나폴레옹 3세는 우파 후보로 대통령이 됐지만 대중의 분노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켰고 황제가 돼선 인기에 영합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동안 안 원장이 정책이든 검증이든 보여준 게 없으니 대통령감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150여년 전 프랑스 군주가 머나먼 한국 정치판에서 회자되는 것도 우습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