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희 맥쿼리증권 회장 "금융은 돈 장사가 아니라 사람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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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과의 맛있는 만남
IB시장 휩쓸며 잘나가던 시절
아내의 癌선고 그리고 사별
그 깊은 슬픔 詩 쓰며 극복
'모든 순간·모든 프로젝트에 최선' 40년 금융맨 생활서 깨달은 진리죠
IB시장 휩쓸며 잘나가던 시절
아내의 癌선고 그리고 사별
그 깊은 슬픔 詩 쓰며 극복
'모든 순간·모든 프로젝트에 최선' 40년 금융맨 생활서 깨달은 진리죠
윤경희 맥쿼리증권 기업금융부 회장(65)은 한국 투자은행(IB)업계 1세대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금융의 ‘정글’에서 올해까지 40년, 투자은행가로서만 36년을 보냈다. 외국계 IB 최고경영자(CEO)로만 20년째다. 말 그대로 국내 IB업계의 산증인이다.
미식(美食)과 술이 없으면 IB 비즈니스를 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그랬다. 술을 거의 하지 못하는 윤 회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환경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IB 역사를 써가고 있는 윤 회장이다.
그는 자주 가는 단골 술집이 하나도 없다. 술을 입에 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미식가라기보다는 거칠고 소탈한 음식을 즐긴다. 충북 옥천 산골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대학 2학년 때 처음으로 생선회를 먹었단다.
그는 시(詩)를 쓴다. 시집(어둠 속에 눈을 뜬들 무엇이 보이랴·도서출판 오감도)도 낸 등단 시인이다. “기업 인수·합병(M&A) 비즈니스의 매력에 푹 빠져 온 힘을 다해 뛰다가,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국문학도를 꿈꿨던 청년 시절의 꿈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윤 회장에게 자주 가는 맛집을 골라 달라고 한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그래도 그는 선뜻 맛집 한 곳을 추천했다. 고객들과 환담을 나눌 때 자주 애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행복한 마음’이라는 상호가 너무 맘에 들었고, 나오는 음식이 시골 어머니의 손맛을 닮았다는 게 윤 회장의 추천사다.
◆순탄치 않았던 출발
서울 경복궁 서쪽 자하문로6길을 따라 걷다가 모퉁이를 돌아서면 커다란 백송(白松) 한 그루를 만난다. 한때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으로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4호에 올랐던 나무다. 1990년 태풍으로 쓰러져 지금은 밑동만 남았다. 그 옆에는 네 그루의 후계목들이 자라고 있다. 이 백송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이 ‘행복한 마음’이다. 윤 회장의 삶은 무수한 세월을 굳건히 버텨온 백송과 어딘가 닮아 있다. 윤 회장도 그의 스타일을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를 많이 길러냈다.
샐러리맨으로 부족하지 않게 돈을 벌고 명성도 쌓았지만, 그의 인생사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65학번)를 나와 사법고시에 낙방해 눈물을 쏟기도 했다. 첫 번째 직장은 농협이었다.
서울대 법대 65학번은 인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대법관만 5명을 배출했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 손지열 전 대법관 등이 동기동창이다.
1972년 시작한 농협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76년 영국 라자드가 설립한 한국종합금융에 입사 원서를 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 구인 광고란에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왔다. “기업을 사고 판다는 문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무작정 원서를 냈죠. IB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1년 만에 영어를 정복하다
윤 회장의 옛 시절을 경청하는 사이 꽃게찜과 녹두전이 나왔다. 밑반찬도 하나둘 깔렸다. 주인인 김보옥 사장이 주말농장에서 키운 유기농 채소로 만든 찬들이다. 해산물은 인천 어시장에서 직접 공수해 왔다고 한다.
윤 회장의 간략한 평가가 곁들여졌다. “이곳 음식의 매력은 각각의 것들이 싱싱하고 깨끗하다는 점이에요. 제 입맛엔 녹두전이 아주 좋은데 다들 어떠신지….”
윤 회장이 한국종합금융에 입사하면서 첫 번째로 부딪힌 난관은 영어였다. “입사시험 면접을 보는데 파란 눈의 외국인이 저만치 앉아 영문 시사잡지를 펼쳐 들더니 질문을 하더군요. 아찔했습니다. 단어가 하나도 안 들리더라고요. 다 틀렸구나 싶었죠.”
필기시험을 워낙 잘 본 덕에 합격은 했지만, 이때부터 영어와 사투를 시작했다. 24시간 영어를 귀에 담고, 입에 달고 다녔다. 새벽 출근 전, 점심시간, 퇴근 후 저녁시간 등 영어학원을 하루 세 차례나 다녔다. 집에 와서는 잠들 때까지 BBC방송을 시청했다.
“당시 가족 가운데 병원에 입원한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병 간호를 했는데 친척들이 그러더라고요. ‘잘 때 보니 영어로 잠꼬대하더라’고요. 이제 됐구나 싶었죠.” 영어를 정복한 덕분에 윤 회장은 라자드 본사 1기 연수생으로 뽑혀 영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았고, 그때부터 IB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시 쓰는 CEO
한국종합금융에서 17년째를 보내던 1993년, 영국계 투자은행인 베어링증권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한국종금 몇 년치 연봉을 한꺼번에 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당시 베어링증권은 슈로더와 함께 국내 IB업계를 선도하는 곳이었다. 연봉도 좋았지만 선진 금융기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두 번째로 직장을 옮겼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실력을 한참 발휘할 무렵인 1995년 베어링증권이 이른바 ‘닉 리슨 사건’에 휘말렸다. 결국 본사가 단돈 1파운드에 ING로 넘어갔다. 베어링 서울지점도 ING베어링으로 합쳐졌다. 베어링 소속이던 윤 회장은 다른 직장을 찾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웬걸. ING베어링은 그를 서울지점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후 윤 회장의 앞길에는 거칠 게 없었다. 포스코 국민은행 등 주요 회사의 유가증권시장 상장 등 굵직한 딜들을 성사시켰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인생의 황금기”였다. G사, S사, ABN암로 등 내로라하는 외국계 IB로부터 달콤한 영입 제안이 날아들었다.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한 쪽에서 얼마를 부르면 다른 한 쪽에선 더 높은 금액을 제시했다. 매일 매일이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2001년 5월 어느 날, 홍콩 출장길에 아내와 통화했다. 평소와 다름 없던 날이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펑펑 울고 있었다. “여보, 나 암이래….” 윤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인생의 꼭대기에서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정말 잘 나가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득했습니다. 모든 걸 한순간에 잃는 것 같았습니다.”
"금융사 해외진출 성공하려면 유능한 현지 파트너 잡아야"
수억원의 연봉도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오로지 아내와 남은 시간을 함께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병원에서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래도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ING에도 사표를 냈고요.”
아내는 미국에 건너간 지 1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그때 윤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것이 시(詩)였다. “시로 그리움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펜을 들었습니다.” 그는 ‘시인정신’의 신인 모집을 통해 등단했다. 2003년에는 시집 ‘어둠 속에 눈을 뜬들 무엇이 보이랴’를 냈다.
시심으로 슬픔을 극복한 윤 회장은 미국으로 건너갈 때 사표를 반려해준 고마움에 보답하듯 ING에서 미친 듯이 일했다. 그리고 2004년 ABN암로로 옮겼고, 2008년엔 맥쿼리에 새 둥지를 틀었다.
◆“매순간 최선”…진리는 통한다
인터뷰가 무르익을 무렵, 전라남도 향토음식인 진석화젓, 굴비 장아찌가 식사와 함께 나왔다. 진석화젓은 싱싱한 굴을 간장을 넣고 삭힌 전라남도 특유의 젓갈이다. 발효하는 데 3개월 이상 걸리는 진미다. 따뜻한 밥 위에 얹어 입에 넣으니 굴 향기가 가득 퍼졌다.
오래 삭혀야 제 맛을 내는 젓갈처럼 윤 회장도 오늘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무던한 세월을 견뎌냈다. 간호를 위해 아내 곁에 머문 1년을 빼곤 쉼없이 일에 몰두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조깅하고, 30분은 무조건 독서에 투자했다. 작은 체구에 온화한 미소, 도대체 무엇이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능하게 했을까.
윤 회장은 맥쿼리 인턴 사원과 최근 나눈 대화로 대답을 갈음했다. “미국 보스턴대에 재학 중인 인턴 직원이었는데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회사에 들어가고, 얼마나 노력해야 회장님처럼 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매 순간, 매 프로젝트,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얘기했습니다. 지금도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수십 번 자문합니다. 도덕 교과서 같은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답니다.”
그래서일까. 그가 지금까지 일하는 원칙도 ‘정직, 성실, 노력’이라고 한다. 남들처럼 술은 못하지만 성실하고 꾸준히 신뢰를 쌓다 보니 IB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후식이 나올 무렵 국내 금융회사들의 해외 진출 방안을 물었다. 그는 “유수의 글로벌 금융사들도 해외 시장에서 자체 역량만으로 자리잡기는 쉽지 않다”며 “현지 금융회사를 M&A하든지, 현지 파트너를 구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은 돈 장사가 아니라 사람 장사입니다. 해외에서 영업하려면 현지 조직을 인수하거나 유능한 현지 인물을 채용하는 게 효율적입니다. 국내에서도 사람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정리=심은지/박동휘 기자 summit@hankyung.com
윤경희 회장 단골집 행복한 마음
전남 향토음식 전문점…젓갈·장아찌 인기
전라남도 향토음식 전문점이다. 주 요리는 젓갈과 장아찌다. 남도 음식 특유의 삭히고 절인 맛이 일품이라는 게 사장의 설명이다. 자연산 굴을 간장에 10번 이상 졸여 3개월 발효시킨 진석화젓과 굴비를 고추장에 삭힌 굴비장아찌 등이 인기가 많다.
서울 통의동에 자리잡은 지 14년째다. 직접 주말농장에서 재배한 싱싱한 채소와 인천 어시장에서 공수해온 해산물을 재료로 쓴다. 메뉴는 점심·저녁 정식이 있다. 계절에 따라 국, 찌개, 생선구이가 다르게 나온다. 점심 정식은 1인분에 3만5000원, 저녁 정식은 7만원이다. 영업시간은 낮 12시~오후 2시, 오후 6시~10시30분이다. (02)733-0995
미식(美食)과 술이 없으면 IB 비즈니스를 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그랬다. 술을 거의 하지 못하는 윤 회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환경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IB 역사를 써가고 있는 윤 회장이다.
그는 자주 가는 단골 술집이 하나도 없다. 술을 입에 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미식가라기보다는 거칠고 소탈한 음식을 즐긴다. 충북 옥천 산골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대학 2학년 때 처음으로 생선회를 먹었단다.
그는 시(詩)를 쓴다. 시집(어둠 속에 눈을 뜬들 무엇이 보이랴·도서출판 오감도)도 낸 등단 시인이다. “기업 인수·합병(M&A) 비즈니스의 매력에 푹 빠져 온 힘을 다해 뛰다가,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국문학도를 꿈꿨던 청년 시절의 꿈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윤 회장에게 자주 가는 맛집을 골라 달라고 한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그래도 그는 선뜻 맛집 한 곳을 추천했다. 고객들과 환담을 나눌 때 자주 애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행복한 마음’이라는 상호가 너무 맘에 들었고, 나오는 음식이 시골 어머니의 손맛을 닮았다는 게 윤 회장의 추천사다.
◆순탄치 않았던 출발
서울 경복궁 서쪽 자하문로6길을 따라 걷다가 모퉁이를 돌아서면 커다란 백송(白松) 한 그루를 만난다. 한때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으로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4호에 올랐던 나무다. 1990년 태풍으로 쓰러져 지금은 밑동만 남았다. 그 옆에는 네 그루의 후계목들이 자라고 있다. 이 백송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이 ‘행복한 마음’이다. 윤 회장의 삶은 무수한 세월을 굳건히 버텨온 백송과 어딘가 닮아 있다. 윤 회장도 그의 스타일을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를 많이 길러냈다.
샐러리맨으로 부족하지 않게 돈을 벌고 명성도 쌓았지만, 그의 인생사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65학번)를 나와 사법고시에 낙방해 눈물을 쏟기도 했다. 첫 번째 직장은 농협이었다.
서울대 법대 65학번은 인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대법관만 5명을 배출했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 손지열 전 대법관 등이 동기동창이다.
1972년 시작한 농협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76년 영국 라자드가 설립한 한국종합금융에 입사 원서를 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 구인 광고란에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왔다. “기업을 사고 판다는 문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무작정 원서를 냈죠. IB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1년 만에 영어를 정복하다
윤 회장의 옛 시절을 경청하는 사이 꽃게찜과 녹두전이 나왔다. 밑반찬도 하나둘 깔렸다. 주인인 김보옥 사장이 주말농장에서 키운 유기농 채소로 만든 찬들이다. 해산물은 인천 어시장에서 직접 공수해 왔다고 한다.
윤 회장의 간략한 평가가 곁들여졌다. “이곳 음식의 매력은 각각의 것들이 싱싱하고 깨끗하다는 점이에요. 제 입맛엔 녹두전이 아주 좋은데 다들 어떠신지….”
윤 회장이 한국종합금융에 입사하면서 첫 번째로 부딪힌 난관은 영어였다. “입사시험 면접을 보는데 파란 눈의 외국인이 저만치 앉아 영문 시사잡지를 펼쳐 들더니 질문을 하더군요. 아찔했습니다. 단어가 하나도 안 들리더라고요. 다 틀렸구나 싶었죠.”
필기시험을 워낙 잘 본 덕에 합격은 했지만, 이때부터 영어와 사투를 시작했다. 24시간 영어를 귀에 담고, 입에 달고 다녔다. 새벽 출근 전, 점심시간, 퇴근 후 저녁시간 등 영어학원을 하루 세 차례나 다녔다. 집에 와서는 잠들 때까지 BBC방송을 시청했다.
“당시 가족 가운데 병원에 입원한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병 간호를 했는데 친척들이 그러더라고요. ‘잘 때 보니 영어로 잠꼬대하더라’고요. 이제 됐구나 싶었죠.” 영어를 정복한 덕분에 윤 회장은 라자드 본사 1기 연수생으로 뽑혀 영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았고, 그때부터 IB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시 쓰는 CEO
한국종합금융에서 17년째를 보내던 1993년, 영국계 투자은행인 베어링증권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한국종금 몇 년치 연봉을 한꺼번에 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당시 베어링증권은 슈로더와 함께 국내 IB업계를 선도하는 곳이었다. 연봉도 좋았지만 선진 금융기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두 번째로 직장을 옮겼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실력을 한참 발휘할 무렵인 1995년 베어링증권이 이른바 ‘닉 리슨 사건’에 휘말렸다. 결국 본사가 단돈 1파운드에 ING로 넘어갔다. 베어링 서울지점도 ING베어링으로 합쳐졌다. 베어링 소속이던 윤 회장은 다른 직장을 찾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웬걸. ING베어링은 그를 서울지점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후 윤 회장의 앞길에는 거칠 게 없었다. 포스코 국민은행 등 주요 회사의 유가증권시장 상장 등 굵직한 딜들을 성사시켰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인생의 황금기”였다. G사, S사, ABN암로 등 내로라하는 외국계 IB로부터 달콤한 영입 제안이 날아들었다.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한 쪽에서 얼마를 부르면 다른 한 쪽에선 더 높은 금액을 제시했다. 매일 매일이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2001년 5월 어느 날, 홍콩 출장길에 아내와 통화했다. 평소와 다름 없던 날이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펑펑 울고 있었다. “여보, 나 암이래….” 윤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인생의 꼭대기에서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정말 잘 나가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득했습니다. 모든 걸 한순간에 잃는 것 같았습니다.”
"금융사 해외진출 성공하려면 유능한 현지 파트너 잡아야"
수억원의 연봉도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오로지 아내와 남은 시간을 함께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병원에서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래도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ING에도 사표를 냈고요.”
아내는 미국에 건너간 지 1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그때 윤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것이 시(詩)였다. “시로 그리움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펜을 들었습니다.” 그는 ‘시인정신’의 신인 모집을 통해 등단했다. 2003년에는 시집 ‘어둠 속에 눈을 뜬들 무엇이 보이랴’를 냈다.
시심으로 슬픔을 극복한 윤 회장은 미국으로 건너갈 때 사표를 반려해준 고마움에 보답하듯 ING에서 미친 듯이 일했다. 그리고 2004년 ABN암로로 옮겼고, 2008년엔 맥쿼리에 새 둥지를 틀었다.
◆“매순간 최선”…진리는 통한다
인터뷰가 무르익을 무렵, 전라남도 향토음식인 진석화젓, 굴비 장아찌가 식사와 함께 나왔다. 진석화젓은 싱싱한 굴을 간장을 넣고 삭힌 전라남도 특유의 젓갈이다. 발효하는 데 3개월 이상 걸리는 진미다. 따뜻한 밥 위에 얹어 입에 넣으니 굴 향기가 가득 퍼졌다.
오래 삭혀야 제 맛을 내는 젓갈처럼 윤 회장도 오늘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무던한 세월을 견뎌냈다. 간호를 위해 아내 곁에 머문 1년을 빼곤 쉼없이 일에 몰두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조깅하고, 30분은 무조건 독서에 투자했다. 작은 체구에 온화한 미소, 도대체 무엇이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능하게 했을까.
윤 회장은 맥쿼리 인턴 사원과 최근 나눈 대화로 대답을 갈음했다. “미국 보스턴대에 재학 중인 인턴 직원이었는데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회사에 들어가고, 얼마나 노력해야 회장님처럼 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매 순간, 매 프로젝트,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얘기했습니다. 지금도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수십 번 자문합니다. 도덕 교과서 같은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답니다.”
그래서일까. 그가 지금까지 일하는 원칙도 ‘정직, 성실, 노력’이라고 한다. 남들처럼 술은 못하지만 성실하고 꾸준히 신뢰를 쌓다 보니 IB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후식이 나올 무렵 국내 금융회사들의 해외 진출 방안을 물었다. 그는 “유수의 글로벌 금융사들도 해외 시장에서 자체 역량만으로 자리잡기는 쉽지 않다”며 “현지 금융회사를 M&A하든지, 현지 파트너를 구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은 돈 장사가 아니라 사람 장사입니다. 해외에서 영업하려면 현지 조직을 인수하거나 유능한 현지 인물을 채용하는 게 효율적입니다. 국내에서도 사람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정리=심은지/박동휘 기자 summit@hankyung.com
윤경희 회장 단골집 행복한 마음
전남 향토음식 전문점…젓갈·장아찌 인기
전라남도 향토음식 전문점이다. 주 요리는 젓갈과 장아찌다. 남도 음식 특유의 삭히고 절인 맛이 일품이라는 게 사장의 설명이다. 자연산 굴을 간장에 10번 이상 졸여 3개월 발효시킨 진석화젓과 굴비를 고추장에 삭힌 굴비장아찌 등이 인기가 많다.
서울 통의동에 자리잡은 지 14년째다. 직접 주말농장에서 재배한 싱싱한 채소와 인천 어시장에서 공수해온 해산물을 재료로 쓴다. 메뉴는 점심·저녁 정식이 있다. 계절에 따라 국, 찌개, 생선구이가 다르게 나온다. 점심 정식은 1인분에 3만5000원, 저녁 정식은 7만원이다. 영업시간은 낮 12시~오후 2시, 오후 6시~10시30분이다. (02)733-0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