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정당의 수명
1947년 5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정당·단체 참가신청을 받을 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접수한 정당·단체가 460개를 넘었다. 당원과 회원수는 남한지역 6200여만명, 북한지역 1330여만명이나 됐다. 합하면 7530여만명이다. 당시 남북한 인구의 3배에 가까운 숫자다. 정당과 단체마다 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앞뒤 안가리고 회원수 부풀리기를 한 결과다.

이런 식의 정당이나 단체에 뚜렷한 이념과 노선, 정책이 있을 리 없다. 국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당장의 이해득실을 계산해 임시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작당(作黨) 수준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등장한 정당들도 이런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87년부터 지금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됐던 정당은 113개, 평균 존속기간은 44개월에 불과하다. 국회의원 임기 4년에도 못미친다.

이 중 선거 때 반짝 생겼다 사라진 것은 빼고 국회의원을 배출한 정당은 40개밖에 안된다. 1년도 안돼 스러진 경우도 많다. 노무현 정부 말기 등장했던 중도개혁통합신당(1개월), 중도통합민주당(8개월), 대통합민주신당(6개월)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영국의 보수당은 1912년 출범했지만 1678년 창당한 토리당 역사까지 합치면 300년이 넘는다. 미국 민주당 역사도 200년 가까이 된다. 서양의 정당정치 역사가 워낙 길기 때문에 평면적 비교는 무리지만 우리 정당의 수명은 너무 짧다.

창당 14년을 넘겨 현존 최장수 정당이라는 한나라당이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 패배에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 돈봉투 사태까지 터지자 간판을 내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다. 자꾸 터지는 악재도 악재지만 더 근본적인 건 정당의 이념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탓이 크다.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말을 빼겠다고 하는 우파정당을 누가 지지하겠는가.

야권도 나을 게 없다. 민주통합당으로 재출범한 지 20일 만에 옛 민주당 출신과 시민단체 출신 간에 내전에 가까운 갈등이 빚어지는 가운데 역시 돈봉투 의혹이 불거졌다. 당권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가리는 양상이다.

먼저 특정 이념을 내세운 정당이 있고 그것이 권력을 만들어내는 게 원론이다. 하지만 우리는 권력이 정당을 만든 경우가 많다 보니 그 수명이 짧을 수밖에. 국익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념과 가치를 분명하게 지키는 정당이라야 오래 간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