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 경제교육연구소장ㆍ논설위원 >

요즘 한창 잘 나간다는 구글은 창업 멤버들이 갖고 있는 주식의 의결권이 소액주주의 10배인 1주당 10개다.

세계 최대 IT기업인 시스코시스템즈는 대주주의 주당 의결권이 무려 1만개다.

이들 기업은 원천적으로 적대적 M&A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영화 업체로 유명한 드림웍스도 대주주 의결권은 주당 10개다.

로퍼 인더스트리라는 회사는 4년 이상 주식을 보유한 주주에게 5개의 의결권을 주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본시장이 최고도로 발달했다는 미국의 기업들이다.

S&P 500대 기업 중 절반이 넘는 255개사가 이와 유사한 차등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

대주주에게 차등 의결권을 부여하는 나라가 미국만은 아니다.

프랑스 등 유럽국들은 주식 보유기간에 따라 2배 혹은 그 이상의 의결권을 준다.

대주주 혹은 장기투자자가, 시황에 따라 주식을 사고파는 소액주주 혹은 투기세력과 결코 같을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에는 보유 기간에 따라 의결권에 차등을 두고 있는 기업이 전체 기업의 무려 64%에 달한다.

스웨덴의 에릭슨사는 대주주의 주당 의결권이 소액주주의 1000배다.

이들 나라의 차등의결권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만일 한국의 창업자 혹은 대주주에게도 차등의결권을 허용했다면 정의선 기아차 사장도,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도 편법 상속을 감행할 아무런 까닭이 없었다.

상속세 50%를 납부하고 나면 곧바로 경영권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어떻게든 길을 뚫어 보려다 이 지경의 낭패를 당한 것이다.

또 정몽구 회장과 이건희 회장까지 연이어 수모를 당하게 됐으니 이는 오로지 '경영권 제도'의 실패다.

흔히 악의적 의도로 '세습'이라고 폄훼해 부르는 경영권 승계도 유독 한국서만 백안시되고 있다.

듀폰도 월마트도 포드도 카길도 모토로라도 바이어컴도 모두 가족 기업이다.

최근 한국서 떼돈을 벌면서 사업을 정리한 까르푸나 한국 외제 자동차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BMW도 가족기업이다.

S&P 500대 기업의 35%가 가족기업이며, 가족이 경영진에 참여하는 광의의 가족기업까지 합치면 이 비율은 67%로 늘어난다.

이들은 대(代)를 물려가면서 가문의 경영 노하우를 전수한다.

가족 기업의 경영실적이 좋다는 것은 지배구조 논란이 많았던 1960년대가 아니라 최근의 연구 결과들이다.

한국 정부가 눈을 부라리는 순환출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해외에서 피라미드라고 부르는 순환출자가 한국처럼 죄악시되는 나라는 없다.

푸르덴셜이나 알리안츠같은 금융사들의 지분구조는 큰 종이 한장에는 모두 그려 넣을 수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루이뷔통으로 유명한 LVMH도 순환출자의 그물망 구조로 경영권을 방어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상호 출자도 드물지 않다.

여기에 '독약 처방'이라고 부르는 비장의 경영권 방어책도 허용되어 있다.

미국 기업의 60%가 도입하고 있는 포이즌 필 제도는 적대 세력이 나타나면 곧바로 싼 값에 대량의 주식을 발행하면서 간단하게 공격자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모든 것이 사치다.

출자규제다 금산법이다 해서 멀쩡한 의결권도 제한하지 못해 안달이다.

경영권 방어와 상속이 우리처럼 금지된 나라가 지구상에는 없다.

지키지 못할 법으로 이토록 많은 '결과적 범죄'를 양산하는 나라도 우리밖에 없다.

그래서 험악한 경영 환경에 포위돼 살아가는 한국의 소유 경영자는 언제나 잠재적 악당 아니면 불한당이다.

말도 많은 재벌들만 그런 것일까.

아니다.

최근에는 벤처기업조차 증자 아닌 고리대 차입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왜? 주식수 늘렸다가 여차직하면 기업을 빼앗기니까.

한국은 기업 경영권 정책에서도 여전히 조선의 주자학적 원리주의가 살아 숨쉬는 시대착오적 국가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