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은 부장품이 많은 왕릉이 대상이 된다.

그 예는 기원전 기록에 나타난다.

고대이집트에서는 왕의 시신이 있는 피라미드에 교묘한 미로를 만들어
놓아도 호리꾼들이 그것을 귀신처럼 찾아내 부장품을 도굴해 갔다.

카이로 서남쪽에 있는 기자에는 높이 1백46.6m, 가로 세로 각 2백30m로
최대 규모인 쿠푸왕(재위 기원전 2590~2567) 피라미드가 있다.

평균 2.5t의 돌 2백30만개를 쌓아 올린 것으로 4천여명의 수련공과 그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30여년에 걸쳐 축조한 것이다.

이 쿠푸왕 피라미드도 매장한지 얼마되지 않아 도굴을 당하고 말았다.

16세기에 유럽탐사가들이 그 안에 들어 갔을 때 텅빈 석관만을 찾아냈다.

다른 피라미드들도 쿠푸왕의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도굴되었다.

그렇게 되자 기원전 1500년께 투트메스1세는 1천7백년전부터 계속되어온
피라미드 축조를 중단하고 테베(지금의 룩소르)의 산골짜기인 "왕들의 계곡"
바위틈에 암굴을 뚫어 왕들의 시신과 부장품들을 암장했다.

그런데도 호리꾼들은 미로나 막다른 골목을 가진 묘, 만들다가 미완성인채
버려둔 것처럼 위장한 밀실까지도 찾아내 도굴해 갔다.

중국 섬서성 여산 남쪽 기슭에 있는 동서 4백85m, 남북 5백15m, 높이
76m의 진시황릉에는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궁전과 호리꾼이 접근하지
못하게 화살자동발사시설을 해 놓았다는 "사기"의 기록이 있다.

호리꾼들의 구미를 충분히 당기게 하는 것이지만 아직까지 도굴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특히 일제강점기에 많은 왕릉들이 도굴을 당해 그 부장품들이
해외로 밀반출되거나 개인의 손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그동안 제대로 보존되어 오던 신라 진덕여왕(재위 47~654)릉이
며칠전 도굴을 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름 14.4m, 높이 4m인 이 왕릉의 봉분에 너비 1.2m, 길이 3m 정도의
구멍을 45도 각도로 뚫은 것으로 보아 석실내부에 있는 상당수의 부장품이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말이야 어떻든 외딴 야산에 있는 왕릉을 무방비상태로 방치해온 당국은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