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극과교수다.

우리나라 교육실정으로 보아 연극과교수는 참 행복하다.

첫째는 학생들 모두가 굉장한 열정을 갖고 학과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타과 동료교수들은 자기과학생중 전공을 원해서 선택한 사람은
극소수인 만큼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거의 짝사랑을 하는 셈이라며 나를
부러워한다.

아무리 이름을 날리고 CF수입등으로 웬만한 직장인은 꿈도 못꿀 경제적
풍요를 누려도 부모들은 여전히 연기자를 직업으로 인정할 수 없는가 보다.

그 직업을 갖고는 자식들이 안정된 인생을 살수 없다고 믿는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과를 선택했기에 우리과 학생들은 부모에게 뭔가
보이고 싶어서라도 4년동안 정말 고생을 마다않고 열심히 배우고
실습하고 작업한다.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고 인생을 같이한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두번째 행복한 이유는 사실 조금은 게으를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이라는 작업 자체가 최신 학문이나 이론.기술등이 계속 개발되는
분야가 아니라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기본으로 하는 까닭에
컴퓨터과학이나 이공계 교수들처럼 새로운 연구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느라
혼을 빼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세상일에서는 장점이 어느순간 단점이 되듯이 바로 이 행운들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정열과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교수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많아지며 자기성찰과 이해는 인간으로서의 고통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해결사라도 되는듯이 고통스런 눈으로 내게 인생에
대한 해답을 기대하는 것이다.

인간은 왜 고통스러워야 하는지,사랑은 왜 아픔으로 끝나야 하는지,삶은
왜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야 하는지. 나 역시 해답을 얻지 못하여
휘청거리며 사는줄 모르고 그들은 내게 해답을 달라며 소리없는
외침을 보낸다.

해답은 없다.

나 또한 그들처럼 고통속에 산다는 것이 행여 위로가 될까해서 얘기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더욱더 큰 좌절을 갖게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삶이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고. 사랑은 아픔이고. 삶은 꼭
고통이어야 한다면 이 전제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면 나도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야겠기에 서서히 그러나 강인하게 마음을 휘어잡기로 했다.

결국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답은 없지만 우리가 할수있는 일은 있다며 일단
탐하는 마음을 놓으면 삶은 덜 고통스럽다고 빈곤하지만 유일한 대답을
제시해준다.

젊은이들에겐 얼마나 서글프고 우울한 방법인가.

내가 그들 나이였을 때 누군가가 내게 무엇엔가 집착하지 말고 원하지
말고 탐하지 않는 길만이 인생을 살수있는 방법이라고 했다면 난 그
사람을 어떤 얼굴로 봤을 것인가.

내가 하는 이말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떻게 받아들여질는지에
대해 사실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생중반을 지나며 얻어진 이 진리가 유일한 길임을 어쩌랴.

어떠한 인연이 닥쳐도 마음에서 모든 고통이 시작되고 그마음은 내안에
있고 그 마음을 좌우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렸으니 그길밖에는 없지 않은가.

어른이 된다는 것,특히 젊은이들 앞에 서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허수아비
처럼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서 나는 사는 법을
분명히 체득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또다시 괴로움은 행운이되고 연극과교수라는 내 직업이
고맙게 느껴진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