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이 없다는 것, 프리랜서 재택근무 4년 차에 접어들었음에도 질리지 않는 달콤함이다. 설령 밤늦게까지 일하거나 끼니를 제때 못 챙기는 일도 부지기수이고, 고정적인 소득 불안을 숙명처럼 짊어져야 하지만, 주도적이고 효율적으로 하루를 설계할 수 있는 지금의 자율성은 앞으로도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쌓일수록 일하면서 묘한 허전함이 커져가고 빠르게 소진된다고 느껴져, 최근 그 이유를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앉아서 종일 키보드만 두드리는 것처럼 보이는 나 같은 책상 앞 작업자도 일하다 보면 여러 상처를 입는다. 기한에 비해 업무량이 방대하게 느껴질 때 초조함에 짓눌리고, 결과물에 대한 날카로운 피드백에 베이기도 하며, 과정에서 발생한 모종의 억울함이나 답답함 때문에 피어오른 분노에 데인다. 요즘의 문제는 이 모든 부상을 대부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나 홀로 일하는 아늑한 공간 안에는 찌푸린 미간만 보고도 ‘무슨 일 있어?’라고 물으며 다가오는 동료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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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박봉이었거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회사에서도 나는 대체로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 많은 돈을 벌거나 내세울 만한 경력은 못 되었을지라도 그 시간들은 분명 나를 키웠다. 그때의 경험을 밑천 삼아 지금도 일한다. 그럴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곁에 좋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 같다. 누군가의 성실함, 재능, 성장 폭을 가까이에서 보는 일은 내 성장의 동력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서 내 강점이나 개선점을 조금이나마 더 뚜렷하게 가늠할 수도 있었다. 일터에서 디테일한 맥락을 공유하는 이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고통도 척하면 알아차리고 편이 되어주거나 정확한 조언을 주려 애쓰며, 일하는 마음에 찾아드는 소용돌이를 달래주었다. 결과물에 대해 대단한 보상까지는 받지 못하더라도, ‘과정을 알아주는 사람’ 몇 명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계속 밀도 높게 일할 힘이 되었다.
슈베르트 창작의 샘터, 슈베르티아데
동료애를 그리며 자연스럽게 슈베르트가 떠올랐다. 31살에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는 작곡을 시작한 이래 약 18년 동안 1,000곡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 이 기록이 더 경이로운 이유는 슈베르트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작품으로 대단한 인정을 받거나 부를 쌓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창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였으니 가능했을 거라고 낭만적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순순하던가. 작곡에 필요한 펜과 종이가 무명 작곡가에게 그냥 샘솟았을 리 없다. 찬 바람과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집도 월세를 계속 내야 머물 수 있다. 무엇보다, 아무도 자신의 곡을 알아주거나 들어주지 않는다는 정신적 고립감은 창작열에 치명적이다. 슈베르트에게는 이 모든 방해 요소를 조용히 걷어내 주는 ‘슈베르티아데’가 있었다.
요제프 아벨이 그린 젊은 슈베르트 / 이미지 출처. Serenademagazine
그들은 작곡가 친구가 혼자 있고 싶어 할 때가 언제인지 알았고, 그러다가도 막 완성한 작품을 들려주고 싶다며, 시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다며, 상의할 것이 있다며, 혹은 그저 함께 어울리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자며 슈베르트가 부를 때는 언제고 달려왔다. - 엘리자베스 노먼 맥케이 지음, 이석호 옮김, 『슈베르트 평전』 (풍월당)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중심으로 친구들이 모여 연주하고, 시를 읽고, 문학이나 철학에 관해 토론했던 사적 모임이다. 시를 주로 노랫말 삼아 600여 가곡을 남긴 슈베르트에게는 그를 위해 선율을 붙일 만한 시를 찾아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생전에 작품들이 거의 출판되지 못한 슈베르트의 가곡집이 처음 출판된 것도 슈베르티아데를 중심으로 한 모금 덕분이었다. 아버지로부터 강요받았던 교사직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른 나이에 부모와 집을 떠난 슈베르트였지만, 의외로 온전히 홀로 산 적이 많지 않다. 돈 한 푼 내지 않고도 친구들 집을 전전하고 피아노를 빌려 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이 그의 천재적인 결과물에만 매료된 추종자들이었다면, 그가 매독과 순환기분장애로 예민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변했을 때 곁을 지키고, 번번이 대외적인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데도 생활비를 쪼개어 종이와 펜을 제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슈베르트 역시 그들을 수동적 감상자보다는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협력 관계로 여겼기에, 막 써 내려간 초고나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성곡을 들려주며 조언과 영감을 구했을 것이다. 정서적 친밀함을 넘어 과정을 함께하고 성패의 무게를 나누는 사이, 이 관계를 ‘동료’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슈베르트가 계속해서 창작할 수 있도록 한 힘의 핵심이 동료애였다고 생각하니, 혼자 일하다 자주 지치고 방전되는 요즘이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슈베르티아데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슈빈트가 그린 슈베르티아데의 모습 / 이미지 출처. Store norske leksikon혼자라는 효율 vs 과정을 나누는 비효율?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 괴로움 알리라! 혼자, 그리고 모든 즐거움과 담 쌓은 곳에 앉아 저 멀리 창공을 바라본다. 아, 날 사랑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먼 곳에 있다! 이 내 눈은 어지럽고 이 내 가슴 타누나.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 괴로움 알리라!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삼환 옮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민음사)
[슈베르트 <미뇽의 노래> 3번 ‘오직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노래 :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슈베르트의 가곡 <오직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는 그가 깊이 동경했던 작가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실린 시에 선율을 입힌 작품이다. 슈베르트는 소설 속 인물인 소녀 미뇽이 부르는 여러 노래 가운데 네 편에 곡을 붙였는데, 그중에서도 이 시는 무려 여섯 번이나 다시 작곡했다. 일평생 수백 편의 시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가 한 편의 시에 이토록 매달린 것을 보면, 그에게 특히나 각별하게 와닿은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내밀한 고통을 노래하는 이 시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리움을 이해해 줄 누군가를 가져본 사람만이 뱉을 수 있는 절실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슈베르트는 우상이었던 괴테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편지와 함께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들을 보냈지만, 어떤 답장이나 반응도 받지 못했다. 일생 동안 이런 류의 시련이 빈번했을 슈베르트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벗들을 그리워했을까 싶어진다. 누군가가 가진 고독과 좌절을 타인과 온전히 다 나눌 수는 없다 해도, 그것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상처는 견딜 수 있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혼자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을 ‘혼자 잡음 없이 매끄럽게’ 해내야 하는 것이 곧 유능함이라 여기게 된다. 물론 지금도 화면 너머의 동료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업무를 조율하지만, 비언어적이고 비효율적인 분투나 흔들림이 묻어나는 생생한 접촉은 텍스트로 점점 더 얇게 정제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일이 결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해도, 내가 일을 지속하는 힘은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해냈느냐에 의해 더 단단하게 쌓인다는 사실을 체감 중이다. 그러나 증인 없이 흐르는 과정의 시간들은 자꾸만 금세 휘발되어 버린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의 모양이 분야를 막론하고 더 개인화되고 파편화될 거라는 전망 속에서, 어쩐지 나는 때로 마찰하고 부딪치더라도 서로 고군분투하며 과정의 여정을 짙게 새길 수 있었던 어느 날들을 자꾸만 그리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