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나도 외국인 근로자 신세…독일에서 받은 사랑 직원들에 돌려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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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기획 - 우리들의 특별한 추석“타국에서 명절 잘보내라고 주는 거야, 피곤해도 머리 꼬박꼬박 잘 감아, 알았지?”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웃음)”
반월공단 도금업체 에이치피씨 이광우 사장
불황에도 매년 외국인 근로자 선물 챙겨
외국인 직원들은 '주인의식' 저절로 생겨나
추석연휴 하루 전인 28일.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의 도금업체 에이치피씨 공장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광우 에이치피씨 사장(63)이 추석을 맞아 인도네시아에서 온 근로자들에게 선물과 떡값을 나눠주면서 펼쳐진 풍경이다. 선물은 샴푸세트다. 샴푸 없이 머리를 감는다는 직원들의 얘기를 들은 이 사장이 직접 추석 선물로 골랐다. 함께 지급된 추석 떡값 역시 한국 직원과 차별 없이 직급과 연차에 따라 10만원에서 많게는 30만원씩 돌아갔다.
봉투를 열어본 한 1년차 외국인 근로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번 명절엔 안산에 있는 친구들과 인도네시아 식당에서 파티를 열 거예요”
에이치피씨는 반월공단 내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의 천국으로 통한다. 계속되는 경기불황 속에서도 월급을 미루지 않고 주는 데다 명절에는 이 사장이 직접 나서 손수 선물과 떡값을 챙겨주고 있어서다.
추석 선물과 관련해 문화적 차이 때문에 웃지 못할 사건도 벌어졌다. 2년 전 추석에 햄이 들어간 캔 선물세트를 나눠줬는데 직원들이 모두 반납한 것.
이 사장은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아에선 돼지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며 “챙겨주려다 화만 키운 거 같아 괜시리 미안했다”고 회상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문화를 조금씩 터득해 가며 지금은 참치캔 등 실용적인 명절선물을 고르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천국
1987년 설립된 에이치피씨는 자동차 알루미늄 휠 크롬 도금 전문업체다. 현대·기아차와 쌍용차 2차 납품업체로 최고급 세단에 들어가는 휠 크롬도금을 독점하며 지난해 7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체 직원 57명 중 절반인 29명이 인도네시아와 중국에서 온 외국인이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 있는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3년 전 한국으로 건너온 25살 청년 코드라트. 지난해까지 평택의 한 사출회사에서 새벽 2시까지 일했지만 야간수당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욕설과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곳으로 옮긴 후에는 업무 숙달능력이 좋고 책임감까지 강해 입사 6개월 만에 주간 작업반장이란 완장을 찼다. 매달 220여만원의 월급도 밀리지 않고 코드라트의 손에 들어온다. 회사에선 외국인 근로자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공장 옥상에 기숙사까지 마련해줬다.
외국인 근로자의 자존심을 살려주니 애사심도 높아졌다. 야간 작업반장인 인도네시아 출신 리잘(29)은 올해 4월 조선족 출신 직장동료가 새벽에 2만4000원어치 동(銅)자재 3㎏을 몰래 오토바이에 싣는 모습을 보고 달려들어 제지하기도 했다.
○이 사장도 독일서 외국인 근로자 경험
이 사장이 외국인 근로자에게 각별한 이유는 다름 아닌 ‘동병상련’ 때문이다. 30년 전인 1981년, 그는 데구사(degussa)라는 독일업체의 선진 도금액 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해 기술연수자 신분으로 독일을 찾았다.
두 달반가량 독일에 머물며 휴일마다 외로움을 달래야 했던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독일인 직원들. 주말마다 이 사장을 저녁식사에 초대해 함께 어울렸다. 이 사장은 “한 번은 함께 차를 탔는데 안전띠를 매지 않은 저를 보고 웃으며 직접 안전띠를 매줬다”며 “잘 모르는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세심하게 배려해주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한국인 직원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이 사장이 외국인 근로자들을 더 챙기는 이유다. 공정상 어쩔 수 없이 화학가스를 맡아야 하는 탓에 한국인 직원들이 손사래치는 도금 일을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묵묵히 도맡아줘서다. 이기우 상무는 “야근 때마다 자양강장음료를 사줬는데 고향에 있는 아버지에게 준다며 가방에 따로 챙기는 모습을 보고 휴가 때 몇 박스를 선물로 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 역시 이들을 부모처럼 느끼고 있다. 코드라트는 “외로울 때 격려해주고 명절 챙겨주는 사장님은 아빠,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주는 상무님은 엄마 같은 분”이라며 “계속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인력난에 허덕이는 도금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들을 정상적인 근로자로 대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인 근로자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 근로자입니다. 우리 회사에 와서 좋은 이미지를 가져가고 배운 기술도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으면 그게 진짜 민간외교죠.”
안산=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