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덕수궁(德壽宮)은 원래 조선 세조의 큰아들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주로 피신했던 선조가 이듬해 한양에 돌아와 행궁으로 삼았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도 이곳에서 정사를 보다가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하고는 서궁(西宮)이라 낮춰 부르게 했다. 광해군을 폐하고 즉위한 인조는 인목대비를 창덕궁으로 모시면서 이곳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덕수궁은 20세기 초 국권을 빼앗기는 과정에서도 여러 사건이 벌어진 격동의 현장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던 고종이 1897년 덕수궁을 새 거처로 삼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당시에는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렸다. 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도 덕수궁 내 중명전이었다.
이런 역사도 역사지만 덕수궁을 더 유명하게 만든 건 바깥의 돌담길이다. 궁을 빙 둘러싼 돌담길은 서울에서 가장 분위기 있는 산책 코스로 꼽힌다. 꽃 피는 봄이나 녹음 물든 여름도 좋지만 낙엽 흩날리는 가을의 돌담길은 어디 내놔도 손색 없는 명소다. 우리나라 첫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쓰이는 경성재판소, 배재학당 같은 고풍스런 건물들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짙은 감성이 묻어나는 노래 ‘광화문 연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 돌담길이 잇따라 들어서는 농성텐트로 몸살을 앓고 있다. 처음엔 쌍용차 해고근로자들 텐트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용산참사 유가족,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자 텐트까지 설치돼 ‘전국구 시위장소’로 변한 느낌이다. 지난 12일엔 시위꾼들이 ‘농성촌’이란 이름을 붙이고 ‘내몰리고 쫓겨난 이들의 공동 거점투쟁을 시작한다’는 선언도 했다.
문제는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못 쓰는 당국이다. 경찰은 불법 시위는 경찰 담당이지만 천막 철거는 구청 소관이라는 입장이고, 단속권을 가진 중구청은 철거방침을 정했으면서도 대선쟁점화될까봐 눈치만 보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는 강제철거를 반대하며 중구청과 시위단체가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는 모양이다.
법 테두리 안에서 시위나 농성을 하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불법이라도 방치하면 더 큰 불법을 낳게 마련이다. 우리사회에서 여전히 ‘떼법’이 통하는 이유다. 그렇게 만추(晩秋)의 덕수궁 돌담길도 농성촌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