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9년 적자회사를 알짜로 바꾼 '뚝심의 승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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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설 LS엠트론 사장…1% 실낱 희망도 '99% 열정'으로 정면돌파

기술부족 악순환 고리를 끊다
빠듯한 예산에도 과감히 투자…최고 품질 기업으로 탈바꿈

사진에 담은 경영메시지
직접 찍은 사진달력 바이어에 선물 "글로벌 1등 飛上하자" 사진 걸어

"이 사람,어느 대학 나왔죠?"



2004년 1월 임원 승진 대상자의 서류를 들춰보던 구자열 LS전선 회장(당시 LS전선 부회장)이 물었다. 심재설 LS엠트론 사장(당시 LS전선 기계사업본부장 · 57)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 구 회장이 다시 물었다. "본인이 추천한 사람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도 답이 없자 구 회장은 컴퓨터 전원을 켰다. 곧이어 사내 전산망을 통해 직원 조회를 마친 뒤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기계사업부 잘 부탁해요. "



기업 오너의 물음에 감히(?)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는 임원이 몇이나 될까? 심 사장은 '인사 기준은 오직 능력과 됨됨이'라며 오너의 질문에 묵묵부답이었고,구 회장은 그런 부하를 웃음으로 끌어안았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을 떠올릴 만한 이 일화는 LS엠트론 직원들이 9년간의 적자를 한번에 털어버린 심 사장을 얘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다. 회사에서 심 사장은 뚝심의 최고경영자(CEO)로 통한다.

◆나의 '빽'은 아버지



그를 담금질한 것은 아버지였다. 대학생이던 어느 날.만취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았다. 그를 끌어안은 아버지는 꺼억꺼억 울음을 토해냈다. 아들은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눈물의 근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가정에 수재(秀才)로 태어나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한 한과 설움이 울음 속에 배어있는 것을 그는 알았다.



2남4녀 중 장남인 심 사장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언제나 아버지의 '희망'이었다. 서울사대부고 재학 시절,부모가 한번도 '공부하라'고 말해본 적이 없을 만큼 그는 든든한 아들이었다. 과학자가 꿈이었던 그가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떨어졌을 때도,어려운 살림에 서울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할 때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재수 끝에 한양대 기계공학과에 붙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 사장은 이런 아버지의 믿음과 기대를 '이심전심'으로 알았다. 그의 실패는 아버지의 실패였고,그의 성공은 아버지의 성공이었다.



대학 2학년 때,과외로 학비를 벌던 그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철도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귀를 의심했지만 현실이었다. 순직한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다. 학생에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 그의 신분은 단박에 달라졌다.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아버지란 '빽'만이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강해져야 했고,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



◆"재설아, 니가 금성사 먹어라"

가장이 된 그는 독하게 돈을 벌어야 했다. '꼭 사장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1978년 1월 현대양행에 입사했다. 당시 현대양행은 트랙터 등 농기계산업의 대표주자였다. 2년 뒤 회사가 LG전자(당시 금성사)로 흡수되면서 LG맨이 됐지만 그는 꿈을 접지 않았다. 언제나 '사장처럼' 일했다.



남보다 두 배,세 배 일했더니 운도 따랐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연구소가 아닌 상품기획 부서에서 일하게 됐다. 제품개발과 영업까지 두루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낸 기획안이 퇴짜를 맞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신바람 나는 날들이 계속됐다.



1991년 LG전자 도쿄지사 수석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난생 처음으로 가족과 달콤한 시간을 가졌다. 그해 여름 한국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당시 주택은행에 다니던 김영일이었다. 서울사대부고 동창으로 그와 자란 환경이 비슷해 곧잘 의기투합하던 '절친'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김씨가 말했다. "재설아,니는 금성사 먹어라.우리 꼭 사장 해야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꿈을 잊고 있었구나. " 그로부터 십수년 후 도쿄에서의 다짐은 현실이 됐다. 그는 LS엠트론 사장자리에 올랐고,김씨는 이후 주택은행 최연소 부행장을 거쳐 SC제일은행에서 부행장을 맡고 있다.



◆"51% 승률이면 과감히 저지른다"



2003년 LS그룹이 LG그룹에서 분리되면서 LG전선은 LS전선이 됐다. 이듬해 그는 상무 승진을 하면서 기계사업본부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기계사업부는 LS의 골칫덩이였다. 1997년 이후 한번도 흑자를 내지 못해 '임원들의 무덤'으로 불렸다. 공장을 돌아보고 임직원을 만나는데 '해보자'는 기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1년을 넘기는 사업본부장이 없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 열정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기계사업부 사람들이 목에 힘주는 날이 오도록 하겠다. 그게 내 목표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감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심 사장은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진단에 들어갔다. 병은 기술 부족에 있다고 판단했다. 기술이 없어 대충 제품을 만들고,무리하게 시장에 내놓으니 반품이 쏟아졌다. 9년 적자행진의 악순환에 사람들의 열의마저 죽었다.



그는 없는 돈을 끌어모아 투자를 결정했다. 투자가 성공할 확률은 51%였지만,1%의 가능성만 있어도 과감히 질러야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간 15억원을 투자해 일본 기술고문을 스카우트했고 품질감시단도 만들었다. 그러기를 4년.2009년 처음으로 2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지난해엔 6915억원 매출에 333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심 사장은 "오랜 적자로 심사가 꼬여있었을 뿐,우리 직원들은 강하다"고 말했다.



◆다시 사진에 빠지다



2008년 구 회장이 그를 불렀다. "기계와 부품사업부를 가져 가라"는 것이었다. LS전선에서 기계와 전자부품 등 8개 사업이 그렇게 떨어져나와 LS엠트론이 됐다. 꿈꿔왔던 '사장'이 돼 회사 경영을 도맡게 되면서 사진찍는 취미를 되살렸다. 업무 스트레스가 높아지면서 나름대로 이를 풀기 위한 처방이었다.



그가 처음 사진기를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월남전에 참전했던 친척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캐논 카메라를 보고 푹 빠져버렸다. 렌즈 속 세상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 길로 사진반을 만들고 2학년 때 처음으로 사진전을 열었다. 사진이론 공부에도 푹 빠졌다.



하지만 그 덕(?)에 재수까지 하게 되자 사진을 접었다. '인생 최초의 실패였다. 내 인생의 실패는 이걸로 끝이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란 결심을 그때 했다.



지천명(知天命)이 훌쩍 지나 사진기를 다시 잡으면서 그는 여유를 찾았다. 직원들에게 사진을 화두로 경영 메시지를 전한다. 직접 찍은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 바이어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올 여름엔 알래스카 출장에 휴가를 붙여 5일간 매일 18시간씩 전투를 치르듯 사진을 찍었다. 혹독한 노동이었다. 그는 그렇게 찍은 사진을 자신의 홈페이지 '해피투게더(www.htogether.com)'에 올렸다. 27세에 만나 30년을 함께한 부인도 요즘 카메라를 잡는다.



그는 올초 집무실 앞에 기러기가 날갯죽지를 펴고 시원하게 창공을 날아가는 커다란 사진 한 장을 인화해 걸었다. 제목은 '비상(飛上)'이다. "2015년까지 매출 4조원대의 글로벌 1등 회사로 날아오르자는 뜻"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능하고 똑똑해서가 아니다. 단지 몰입했을 뿐이다. LS엠트론의 재미있는 일들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