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 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신경림,가난한 사랑 노래 중에서) 결핍은 슬프고 불편한 것이다. 때로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때의 가난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성공을 담보로 했을 때다. 극복하지 못한 가난은 결코 영롱한 추억일 수 없다. 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54)은 젊은 시절 그 흔한 데이트도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돈이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지독했던 가난은 이별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의 오 사장은 전혀 궁색하지 않다.
1974년 입사해 30년만에 최고경영자(CEO)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또 공학 박사다.
21개 특허와 5개 실용 신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원한 국내 최고의 타이어 전문가다.
지난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엑스타 STX(26인치)'도 그의 작품이다.
지난 30년 동안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오 사장은 전남 나주군 다시면에서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그의 고생 길은 시작됐다.
중학교(광주서중) 때는 광주에서 누나와 함께 자취를 했다.
그 시절 그는 우산이 없어 비가 오면 그대로 맞았고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냈다.
친구들이 형형색색의 과자와 사이다를 싸들고 떠난 텅 빈 교정에서 그는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광주제일고 시절 역시 마찬가지.등록금은 담임 선생님이 대신 내줬다.
도시락은 고교동창 문재완씨(현 아시아나IDT 상무)가 두개를 싸와 해결해줬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함께 자취하던 누님이 다른 도시로 취직이 돼 떠났기 때문이다.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나날이 고민은 불어났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런 꿈도,의욕도 가질 수 없었다.
어느날인가,해 저문 학교 운동장에 앉아 눈물 흘린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
가난은 어린 학생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로였다.
첫해 대학입시에 낙방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가야 했다.
재수 시절 12개월 중 9개월은 돈을 벌고 3개월만 공부했다.
봄 가을엔 건설 현장의 잡역부로 일하고 여름엔 광주시내를 돌아다니며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닳아 빠진 검정 고무신 사이로 진물이 흘러나왔지만 '아이스케키-'를 목이 터져라고 외쳐야 했다.
67년 전남대 화학공학과 합격증을 받아들고 다시 울었다.
그가 어떻게 대학을 다녔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대학 1학년 2학기 때 무기정학을 당했다.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돈을 받고 누군가의 대리시험을 봐주다가 적발된 것.그 길로 그는 군에 입대했다.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 가난이다.
그를 궁핍에서 건져올린 것은 74년 입사한 삼양타이어(현 금호타이어)였다.
금호그룹 창업주 고(故)박인천 회장이 61년 광주지역에 설립한 대규모 타이어 공장이다.
입사 성적은 33명의 공채시험 합격자 중 수석이었다.
"이제 저도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직장에서 사람 구실을 하며 생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습니다." 첫 보직은 연구과 직원.오랜 가난에 짓눌려 있던 그의 잠재력은 이 때부터 폭발하기 시작했다.
입사 2년만에 연구과장 직무대리로 수직상승했다.
밤낮 없이 연구에 매달린 끝에 77년 항공기 및 장갑차용 타이어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펑크가 난 상태에서 시속 80km로 50km를 달릴 수 있는 특수 타이어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입사한 지 불과 3년 밖에 안된 시기였다.
그해 말 국방부 장관상도 받았다.
78년엔 회사 돈으로 말레이시아의 고무연구소에 1년간 연수를 다녀왔다.
신입사원 시절 그는 3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가난이 징그러웠던 그는 통근 차비 외에는 단 한푼도 쓰지 않고 돈을 모았다.
75년 중매로 만난 정미란씨(52)와 결혼했다.
월셋방을 전전했지만 단란하고 행복했다.
76년 그의 통장 잔액은 1백만원으로 불어났다.
내집 마련의 꿈은 79년에 이뤄졌다.
약간의 융자를 안고 광주시 월산동에 대지 34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회사가 없었더라면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살았겠습니까? 달라진 제 처지를 생각하며 하루에도 몇번씩 감사하는 마음을 느낍니다."
연구소 생활은 90년대 초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시절 출시된 금호타이어의 신제품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인사고과 덕분에 승진도 빨랐다.
하지만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그 것도 자신은 물론 회사도 망가뜨릴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94년 이사가 되고 난 뒤다.
당시 오 사장은 기아자동차로부터 연비가 좋은 타이어를 개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무 합성비율을 달리한 신제품을 개발해 대량 공급했다.
단가도 좋고 물량도 많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수출 선적을 위해 인천항에 세워둔 자동차의 타이어가 여름철 뜨거운 햇볕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고무를 합성하면서 햇볕을 차단할 수 있는 노화방지제를 넣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전량 클레임을 당해 손실을 입은 것은 감수한다 하더라도 향후 거래를 재개하는 것 조차 불투명해졌다.
해고까지 각오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때부터 한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말 그대로 불철주야 대체 제품 제작에 매달린 끝에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다.
신제품 브리핑을 위해 기아 소하리 연구소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집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부인이 병원에서 암(癌)진단을 받았다고 울먹였다.
브리핑은 잘 끝났지만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무작정 성당으로 달려가 영세를 해달라고 매달렸다.
오진으로 판명돼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고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는 얘기가 실감납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도 새삼 깨달았고요. 그것은 또 다른 공부였습니다."
오 사장은 자신이 CEO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연구소장 정도가 알맞은 눈높이라고 여겨왔다.
금호는 94년 1월1일 그를 생산담당 상무로 광주공장에 전격 투입했다.
평소 오 사장의 원만한 성품을 눈여겨본 고(故)박정구 금호 회장의 전략적 결정이었다.
당시 광주공장의 노사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오 사장은 하루에 세번씩 석달 동안 현장을 돌았지만 근로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인사를 하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사표를 내겠다고 말했다.
아랫사람들로부터 인사도 받지 못하는 임원이 어떻게 회사를 다니겠느냐고 했다.
부인은 오 사장의 말뜻을 이해하고 선선히 수용했다.
단 조건을 달았다.
이제 자신이 장사를 해야겠으니 창업준비를 하는 동안 두달만 회사를 더 다녀달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부인의 판단은 현명했다.
남은 두달 동안 노사관계는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노조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행태를 지양했다.
근로자들은 오 사장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현장에 매달렸다.
오 사장에게 연구활동과 생산관리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었다.
노사관계가 안정을 찾으면서 생산성도 올라갔다.
96년 회사는 그를 광주공장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성공적인 '전업'이었다.
"요즘 청년 실업자들을 보면 기업인의 책무가 막중하다는 것은 새삼 깨닫습니다. 좋은 기업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가난을 몰아낼 수 있는 첩경입니다."
결핍도 도를 넘어서면 사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오 사장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는 이들에 대한 보도를 봐도 남들처럼 "죽을 용기로 왜 열심히 살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나"라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 사장은 바람잘 날 없던 자신의 청춘을 곱게 추억하고 있다.
비록 가난했지만 좋은 머리와 튼튼한 체력,결코 가난에 꺾이지 않겠다는 기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CEO가 된 날 그는 지난 70년에 돌아가신 선친의 묘소를 찾아 감사의 절을 올렸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돈이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지독했던 가난은 이별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의 오 사장은 전혀 궁색하지 않다.
1974년 입사해 30년만에 최고경영자(CEO)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또 공학 박사다.
21개 특허와 5개 실용 신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원한 국내 최고의 타이어 전문가다.
지난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엑스타 STX(26인치)'도 그의 작품이다.
지난 30년 동안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오 사장은 전남 나주군 다시면에서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그의 고생 길은 시작됐다.
중학교(광주서중) 때는 광주에서 누나와 함께 자취를 했다.
그 시절 그는 우산이 없어 비가 오면 그대로 맞았고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냈다.
친구들이 형형색색의 과자와 사이다를 싸들고 떠난 텅 빈 교정에서 그는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광주제일고 시절 역시 마찬가지.등록금은 담임 선생님이 대신 내줬다.
도시락은 고교동창 문재완씨(현 아시아나IDT 상무)가 두개를 싸와 해결해줬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함께 자취하던 누님이 다른 도시로 취직이 돼 떠났기 때문이다.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나날이 고민은 불어났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런 꿈도,의욕도 가질 수 없었다.
어느날인가,해 저문 학교 운동장에 앉아 눈물 흘린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
가난은 어린 학생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로였다.
첫해 대학입시에 낙방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가야 했다.
재수 시절 12개월 중 9개월은 돈을 벌고 3개월만 공부했다.
봄 가을엔 건설 현장의 잡역부로 일하고 여름엔 광주시내를 돌아다니며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닳아 빠진 검정 고무신 사이로 진물이 흘러나왔지만 '아이스케키-'를 목이 터져라고 외쳐야 했다.
67년 전남대 화학공학과 합격증을 받아들고 다시 울었다.
그가 어떻게 대학을 다녔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대학 1학년 2학기 때 무기정학을 당했다.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돈을 받고 누군가의 대리시험을 봐주다가 적발된 것.그 길로 그는 군에 입대했다.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 가난이다.
그를 궁핍에서 건져올린 것은 74년 입사한 삼양타이어(현 금호타이어)였다.
금호그룹 창업주 고(故)박인천 회장이 61년 광주지역에 설립한 대규모 타이어 공장이다.
입사 성적은 33명의 공채시험 합격자 중 수석이었다.
"이제 저도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직장에서 사람 구실을 하며 생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습니다." 첫 보직은 연구과 직원.오랜 가난에 짓눌려 있던 그의 잠재력은 이 때부터 폭발하기 시작했다.
입사 2년만에 연구과장 직무대리로 수직상승했다.
밤낮 없이 연구에 매달린 끝에 77년 항공기 및 장갑차용 타이어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펑크가 난 상태에서 시속 80km로 50km를 달릴 수 있는 특수 타이어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입사한 지 불과 3년 밖에 안된 시기였다.
그해 말 국방부 장관상도 받았다.
78년엔 회사 돈으로 말레이시아의 고무연구소에 1년간 연수를 다녀왔다.
신입사원 시절 그는 3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가난이 징그러웠던 그는 통근 차비 외에는 단 한푼도 쓰지 않고 돈을 모았다.
75년 중매로 만난 정미란씨(52)와 결혼했다.
월셋방을 전전했지만 단란하고 행복했다.
76년 그의 통장 잔액은 1백만원으로 불어났다.
내집 마련의 꿈은 79년에 이뤄졌다.
약간의 융자를 안고 광주시 월산동에 대지 34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회사가 없었더라면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살았겠습니까? 달라진 제 처지를 생각하며 하루에도 몇번씩 감사하는 마음을 느낍니다."
연구소 생활은 90년대 초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시절 출시된 금호타이어의 신제품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인사고과 덕분에 승진도 빨랐다.
하지만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그 것도 자신은 물론 회사도 망가뜨릴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94년 이사가 되고 난 뒤다.
당시 오 사장은 기아자동차로부터 연비가 좋은 타이어를 개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무 합성비율을 달리한 신제품을 개발해 대량 공급했다.
단가도 좋고 물량도 많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수출 선적을 위해 인천항에 세워둔 자동차의 타이어가 여름철 뜨거운 햇볕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고무를 합성하면서 햇볕을 차단할 수 있는 노화방지제를 넣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전량 클레임을 당해 손실을 입은 것은 감수한다 하더라도 향후 거래를 재개하는 것 조차 불투명해졌다.
해고까지 각오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때부터 한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말 그대로 불철주야 대체 제품 제작에 매달린 끝에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다.
신제품 브리핑을 위해 기아 소하리 연구소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집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부인이 병원에서 암(癌)진단을 받았다고 울먹였다.
브리핑은 잘 끝났지만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무작정 성당으로 달려가 영세를 해달라고 매달렸다.
오진으로 판명돼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고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는 얘기가 실감납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도 새삼 깨달았고요. 그것은 또 다른 공부였습니다."
오 사장은 자신이 CEO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연구소장 정도가 알맞은 눈높이라고 여겨왔다.
금호는 94년 1월1일 그를 생산담당 상무로 광주공장에 전격 투입했다.
평소 오 사장의 원만한 성품을 눈여겨본 고(故)박정구 금호 회장의 전략적 결정이었다.
당시 광주공장의 노사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오 사장은 하루에 세번씩 석달 동안 현장을 돌았지만 근로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인사를 하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사표를 내겠다고 말했다.
아랫사람들로부터 인사도 받지 못하는 임원이 어떻게 회사를 다니겠느냐고 했다.
부인은 오 사장의 말뜻을 이해하고 선선히 수용했다.
단 조건을 달았다.
이제 자신이 장사를 해야겠으니 창업준비를 하는 동안 두달만 회사를 더 다녀달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부인의 판단은 현명했다.
남은 두달 동안 노사관계는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노조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행태를 지양했다.
근로자들은 오 사장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현장에 매달렸다.
오 사장에게 연구활동과 생산관리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었다.
노사관계가 안정을 찾으면서 생산성도 올라갔다.
96년 회사는 그를 광주공장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성공적인 '전업'이었다.
"요즘 청년 실업자들을 보면 기업인의 책무가 막중하다는 것은 새삼 깨닫습니다. 좋은 기업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가난을 몰아낼 수 있는 첩경입니다."
결핍도 도를 넘어서면 사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오 사장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는 이들에 대한 보도를 봐도 남들처럼 "죽을 용기로 왜 열심히 살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나"라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 사장은 바람잘 날 없던 자신의 청춘을 곱게 추억하고 있다.
비록 가난했지만 좋은 머리와 튼튼한 체력,결코 가난에 꺾이지 않겠다는 기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CEO가 된 날 그는 지난 70년에 돌아가신 선친의 묘소를 찾아 감사의 절을 올렸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