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실무를 기반으로 공간을 해석하고,
콘텐츠와 커뮤니티로 확장해온 공간 기획자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입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건축·공간 콘텐츠 채널 ‘공간교과서’를 운영하며,
건축을 매개로 도시·라이프스타일·브랜드 경험을 읽어내는 글과 콘텐츠를 제작해 왔습니다.
전문가의 언어와 대중의 감각 사이를 잇는 서사 방식을 통해
공간을 ‘보는 대상’이 아닌 경험되고 기억되는 장면으로 전달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대구광역시 군위군에 위치한 사유원에는 두 개의 사유가 있다. 하나는 한 기업가가 평생에 걸쳐 사적으로 모은 것, 사유(私有)다. 다른 하나는 그 수집이 모두에게 열어준 생각의 시간, 사유(思惟)다. 이 정원은 전자가 후자가 되어 간 과정의 기록이다.그래서 이곳은 불편하다.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고, 입장료는 평일에도 5만 원이며, 드넓은 영역을 정해진 시간 내에 걸어야 한다. 모든 것이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매끄럽게'를 향해 달리는 시대에 정반대다. 그러나 이 불편은 결함이 아니다. 귀하게 모은 것일수록 함부로 소비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된 마찰이다. 누구나 쉽게 닿는 것은 쉽게 잊힌다는 사실을, 이 정원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이 평생 모은 것시작은 한 그루 나무였다. 1989년, 태창철강을 이끌던 설립자 유재성 회장은 300년 된 모과나무 네 그루가 일본으로 실려 나간다는 소식에 부산항으로 달려가, 시세의 네 배를 치르고 출항을 막았다. 그는 2006년 군위군에 부지를 마련했고, 다시 15년을 들여 2021년 가을, 약 20만 평의 정원으로 열었다. 부산항에서 구해낸 그 모과나무들이, 붉게 녹슨 코르텐 화단 위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에 서 있다. 수백 년의 풍상을 견딘 굵은 줄기와 뒤틀린 가지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서서, 정원의 이름값을 여기서 완성한다.수집은 나무에 그치지 않았다. 물의 정원 사담은 그 절정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이 건물은 구로 철판으로 외장을 둘러, 묵직하고 진중한 물성으로 풍경을 해치지 않는다. 장방형의 몸체가 잔잔한 연못에 그대로 비쳐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수면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담고 나무를 비춘다. 비단잉어가 노니는 연
대구 군위군에 자리한 사유원에는 두 가지 사유가 있다. 하나는 한 기업가가 평생에 걸쳐 사적으로 모은 사유(私有)요, 다른 하나는 그 수집이 모두에게 열어준 생각의 시간, 사유(思惟)다. 이 정원은 전자가 후자가 돼 간 과정의 기록이다.이곳은 불편하다. 예약해야 하고, 입장료는 평일에도 5만원에 달하며 드넓은 영역을 정해진 시간 내에 걸어야 한다. 모든 것이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매끄럽게’를 향해 달리는 시대에 정반대를 향해 있다. 그러나 이 불편은 의도된 마찰이다. 귀하게 모은 것일수록 함부로 소비되지 않게 하고자 하는 배려다. 누구나 쉽게 닿을 수 있는 것은 쉽게 잊힌다는 사실을 이 정원은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이 평생 모은 것시작은 한 그루 나무였다. 1989년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은 ‘300년 된 모과나무 네 그루가 일본으로 실려 나간다’는 소식에 부산항으로 달려가 시세의 네 배에 달하는 값을 치르고 출항을 막았다. 그는 2006년 군위군에 부지를 마련했고, 다시 15년을 들여 2021년 가을, 66만㎡(약 20만 평) 규모의 정원을 열었다. 부산항에서 구해낸 모과나무들이 코르텐 화단 위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에 서 있다. 수백 년의 풍상을 견딘 굵은 줄기와 뒤틀린 가지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서서 정원의 이름값을 완성한다.수집은 나무에 그치지 않았다. 물의 정원 사담은 그 절정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이 건물은 구로 철판으로 외장을 둘러 묵직한 물성으로 풍경을 해치지 않는다. 장방형의 몸체가 잔잔한 연못에 그대로 비쳐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수면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담고 나무를 비춘다. 현대 건축과 수백 년 된 자연이 한 장면으로 포개지는 곳이
요즘 사람들은 달린다. 이른 아침 한강변을 가득 채운 러너들, 러닝 크루의 SNS 피드, 마라톤 대회마다 조기 마감되는 접수 창구. 동시에 사람들은 미술관에 간다. 아침 일찍 줄을 서고, 예약을 하고, 때로는 두세 시간을 이동해서 전시 하나를 보고 돌아온다. 표면적으로 이 두 현상은 달라 보인다. 하나는 몸을 쓰는 일이고, 하나는 눈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가 같은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주체성에 대한 요구다.러닝이 유행하는 이유는 건강 열풍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헬스장은 예전부터 있었다. 러닝이 특별한 건 그것이 철저히 자기 주도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몇 시에 나갈지, 어느 방향으로 달릴지, 언제 멈출지, 모두 내가 결정한다. 달리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자신의 것인 시간 안에 있다. 알림도, 메시지도, 회의도 없다. 오직 호흡과 발 소리뿐이다. 미술관에 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다만 미술관은 몸 대신 감각으로 그 경험을 만든다. 알고리즘이 침투하지 못한 시간우리는 오랫동안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해 왔다.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영상을 보고, 거대 플랫폼이 큐레이션한 순서대로 음악을 들었다. 편리했지만, 내가 골랐다는 감각, 내 의지로 여기에 왔다는 감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낀다.사람들이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그것이 아직 알고리즘이 침투하지 못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 동인은 타인의 추천, 누군가의 사진 한 장일 수 있어도, 어떤 공간에서 어떤 시간에 작품 앞에 얼마나 오래 서 있을지는 나만이 결정한다.무엇을 보고 무엇을 건너뛸지, 몇 층부터 시작할지,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지 말지. 미술관에서의 시간은 완전히 내 것이다. 플랫폼
종교 건축은 오랫동안 ‘내부자’의 성역이었다. 신자만 이해할 수 있는 상징과 의례의 언어가 공간을 채우곤 했다. 그런데 최근의 종교 공간은 결이 다르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도, 교리를 몰라도 어떤 법당, 예배당에 들어서면 이유 없이 마음이 편해지고 더 머물고 싶어진다.이 변화는 종교 시설이 스스로를 성역이 아니라 ‘도시의 쉼터’로 정의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빠른 속도에 지친 도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요즘 종교 건축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구조’로 먼저 다가간다. 일부러 길을 길게 만들고 빛을 은은하게 쏟아내며 입구를 깊게 만드는 방식. 이런 장치들은 교리를 몰라도 몸의 움직임을 바꾼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시선이 정돈되면서 자연스레 체류하게 된다. 이제 종교 건축은 특정 신자를 위한 시설을 넘어 도시가 공유할 수 있는 인프라로 작동하고 있다.교리는 몰라도 끌리는 공간경기 화성 남양성모성지는 그 전환을 가장 거대한 규모로 보여준다. 이곳은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를 기억하는 장소로, 1991년 한국 교회 중 처음 성모 마리아 순례성지로 선포됐다.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대성당은 형태보다 ‘배치’에 중점을 뒀다.성당은 언덕 사이 계곡에 편입되듯 놓여 있다. 탑을 제외하면 대성당은 지형을 따라 낮은 자세로 자리 잡고 있다. 방문객은 경사지 아래 광장에서 시작해 묵주기도의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른다. 이 동선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소음 가득한 도시와 결별하기 위한 ‘시간 벌리기’용 장치다.성당 내부는 강
세토 내해를 마주한 일본 카가와현. 많은 이들이 우동과 소도시 여행지로 떠올리지만, 건축과 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다카마쓰라는 지방 도시와 그 앞바다의 작은 섬 나오시마는 이제 세계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순례지가 됐다.화려한 스카이라인도, 거대한 랜드마크도 없지만, 오래 기억되는 이유가 있다. 카가와현의 건축물과 공간들은 과시하는 형태보다 풍경과 시간, 빛과 재료를 통해 사람의 감각과 인식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카가와현의 이 힘은 ‘무엇을 더 세울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있다.다카마쓰에서는 에도 시대 회유식 정원과 전후 공공건축의 걸작이 나란히 서 있고, 무레에서는 조각가가 직접 다듬은 땅과 돌, 담장이 하나의 연속된 공간 경험을 만든다. 바다를 건너 나오시마에 들어서면 건축은 더 조용해진다. 언덕 아래로 숨어들고, 바다를 프레임으로 끌어들이며, 콘크리트와 자연광만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이 지역이 특별한 것은 미술관이 많아서가 아니라, 각각의 장소가 독립된 명소로 끝나지 않고, 지역 전체가 건축과 예술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그 시작은 다카마쓰의 리쓰린 공원이다. 17세기 초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이 정원은 일본을 대표하는 회유식 정원으로 미슐랭 그린 가이드 3스타를 받았다. 여섯 개의 연못과 열세 개의 언덕, 시운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은 한 지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산책로를 따라 이동할 때마다 시선의 높이와 각도가 달라지며 새로운 구도가 펼쳐진다. 정원은 ‘보는’ 것이 아니라 ‘걷는’ 과정에서 장면이 계속 바뀌도록 설계됐다. 이 ‘이
종교 건축은 오랫동안 ‘내부자’를 위한 건축이었다.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과 의례, 교리의 언어가 공간을 구성했다.그런데 최근의 종교 공간은 다른 장면을 만든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도, 교리를 알지 못해도, 어떤 성지와 법당, 채플과 기념관에 들어서면 이유 없이 머물고 싶어진다.이 변화는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공간의 재정의에서 시작된다. 종교 시설이 스스로를 ‘성역’이 아니라 ‘도시의 쉼터’로 위치시키기 시작하면서다. 빠르고 밀도 높은 도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속도를 낮출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설명보다 먼저 작동하는 것은 구조다. 길을 길게 만들고, 조명과 빛을 직접적으로 쏟아붓지 않으며, 진입을 깊게 두는 방식. 이런 장치들은 교리를 몰라도 몸의 움직임을 바꾼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시선이 정돈되며 체류가 가능해진다.그 구조를 함께 경험하게 되면서 종교 건축은 특정 신자를 위한 시설을 넘어, 도시가 공유할 수 있는 인프라로 작동한다. 신앙을 전제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공간. 그 조건에서 오늘날 종교 건축의 새로운 역할이 드러난다.남양 성모성지, 성지가 공원이 될 때남양 성모성지는 그 전환을 가장 큰 스케일로 보여준다. 경기 화성의 남양 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순교지를 기억하는 장소이자, 1991년 한국 교회 최초의 성모 마리아 순례성지로 선포된 곳이다. 통일기원 대성당은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했다.이 건축의 핵심은 형태보다 배치에 있다. 대성당은 언덕 사이의 계곡에 편입되듯 놓여 있다. 탑을 제외하면 대성당은 지형을 따라 낮게 자리 잡는다.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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