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 사채관리회사제도

잠재고객 감시 껄끄럽고 낮은 수수료도 부담
[마켓인사이트] 동양사태 벌써 잊었나…증권사 절반 '회사채 관리' 눈감았다

마켓인사이트 10월9일 오후 1시14분

한라건설은 2012년 9월 24일 만기 2년짜리 회사채(한라건설 77)를 발행하면서 부국증권과 ‘사채관리계약’을 맺었다. 부국증권은 투자자(채권자)를 대신해 발행 회사가 채권자에 약속한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 지 감시하는 사채관리회사다.

계약 내용 중 한라건설은 만기 시까지 부채비율을 500% 미만으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작년 12월 말 보고서상 한라건설의 부채비율은 572%에 달했다. 채권 투자자들이 만기 전에 투자금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사유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사채관리회사는 홈페이지(수탁계약 이행상황 보고서)를 통해 의무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알려야 했지만 부국증권은 이행하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과 에프앤가이드가 9일 24개 증권사와 증권금융, 예탁결제원, 우리종금 등 총 27개 사채관리회사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한 결과, 4개사만이 감시의무를 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증권사 가운데 14곳은 아예 업무를 수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동양 사태 때도 작동 안한 제도

[마켓인사이트] 동양사태 벌써 잊었나…증권사 절반 '회사채 관리' 눈감았다

금융위원회는 채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채관리와 관련한 이해상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2년 4월 상법을 고쳐 ‘사채관리회사제도’를 도입했다. 기존엔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인수하는 증권회사 등이 사채관리 업무도 함께 수행했다. 하지만 회사채 투자자보다는 발행회사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등 채권자가 불이익을 받는다는 지적에 따라 새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했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지난해 9월 ‘동양 사태’가 났을 때 사채관리회사들이 보여준 행태가 현실을 잘 반영한다. 동양시멘트 등 동양그룹 계열사가 발행한 회사채(16종)에 대해 관리 의무를 맡은 회사는 우리종금(옛 금호종금), 유진, IBK투자, 한화, KTB투자증권 등이었다.

이 중 KTB증권은 정기적인 재무, 신용 변동 사항에 대한 공시를 누락했다가 (주)동양 등 5개 계열사의 법정관리 신청 이후 뒤늦게 고지했다.

◆증권사 절반 이상 의무 ‘태만’

동양 사태 이후에도 사채관리회사로 지정된 27개사 중 상당수가 여전히 회사채 발행 회사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다. 지난해 발행된 무보증 공모채권을 기준으로 27개 사채관리회사가 관리의무를 맡은 회사채는 총 387종이었다. 이 중 253개는 제때 공시가 이뤄졌으나 미공시 종목도 134개에 달했다.

그나마 증권금융, 예탁결제원, 우리종금 등 회사채 발행 주관 및 인수 업무를 하지 않은 기관들이 감시 의무를 제대로 한 덕택이다. 이들을 제외한 24개 증권사만 보면 미공시 종목의 비율이 급상승한다. 이들 증권사가 맡은 163개 관리 대상 회사채 가운데 공시가 이뤄진 종목은 40개에 불과했다.

신한금투, 우리, 메리츠종금, 유안타, 동부, 하나대투, 대신, SK, NH농협, LIG, KTB, KB, 키움, 이트레이드증권 등 14곳은 감시대상 회사채에 대한 공시 내용이 전무했다. 사실상 회사채 관리업무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증권사 관계자는 “이해관계 상충을 막기 위해 발행 증권사와 사채관리회사를 분리하긴 했지만, 언젠가 해당 기업으로부터 회사채 발행업무를 따려는 증권사가 감시 업무를 제대로 하긴 힘들다”며 “사채관리업무에 대한 수수료가 너무 낮아 전담 인력을 두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 사채관리회사

회사채 투자자들을 대신해 발행사의 계약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채권자집회 운영 등을 맡도록 지정된 회사. 기업이 무보증 공모 회사채를 발행할 경우 의무적으로 사채관리회사를 지정해야 한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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