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AI는 인간에게 성숙해질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전 세계 출판계는 지금 ‘앤트로픽 공포’에 휩싸여 있다. 인류의 오랜 지적 자산으로 여겨졌던 수십만 권의 책들이 도서유통업체를 통해 스캔 전문 업체로 넘겨지고, 단단하게 묶인 책등이 단 몇 초 만에 칼날로 잘려 나가며, 낱장으로 분리된 종이들은 초고속 스캐너를 통과하고 있다. 생성형 AI 기업들의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으로 인해 정신세계의 유산들이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고, 영혼을 빼앗긴 종이 뭉치들은 순식간에 폐기물로 버려지고 있다.

‘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Richard David Precht)가 최근 새롭게 선보인 책 <이야기의 종말(Auserzählt?)>의 인기가 대단하다. 일반 대중이 읽기 어려운 ‘철학 에세이’ 분야지만, 출간되자마자 슈피겔 베스트셀러 논픽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책은 생성형 AI 기업들의 공습으로 ‘인간 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창작’과 ‘스토리텔링’ 분야가 빠르게 침범당하면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빅테크 자본주의가 인간의 ‘사유할 권리’와 ‘문화적 자존감’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다.

오랜 기간 인류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해 왔다. 문화 예술, 종교, 그리고 역사는 모두 인간이 서로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통해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AI가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교하게 시와 소설 그리고 시나리오를 창작해 내고 있다. AI가 단순히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뿐만 아니라, 예술 창작과 이해의 영역까지 대체하고 있다.

프레히트는 “이제 인간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즐기던 시대는 끝나버린 것인가?”라는 서글픈 질문을 던진다. 평생 지적 호기심을 잃지 않고 지식인으로 살아왔지만 결국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재를 회상하면서, 아버지가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과 AI의 공습으로 인간 고유의 정신과 깊이 있는 문화가 사라져가는 과정을 비교한다.

책은 AI와 신기술의 ‘즉각성’을 문제 삼는다. 이야기를 만들고 지식을 얻는 과정에는 고뇌와 기다림, 즉 ‘사유의 고통’이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사색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구상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다. 하지만 AI는 이러한 번거로움과 기다림을 허용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자마자 단 몇 초 만에 완성된 답을 내놓는다.

그래서 프레히트는 “편리함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즉각성이야말로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적 공백을 박탈하는 기술적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물만 요구하는 세상에서 인간 고유의 정신적 깊이는 결국 바닥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는 세상에서는 결핍이 사라지고, 결핍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문화적 권태’가 들어선다. 실제로 우리는 알고리즘에 의해 커스터마이징된 세상에 살아가게 되면서 특별한 경이로움이나 실존적 감동을 경험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AI는 인간에게 성숙해질 시간을 주지 않는다
치매 환자가 과거의 기억과 서사를 잃고 오직 ‘현재의 단면’ 속에 갇혀 살아가듯, 즉각성에 중독된 우리 역시 역사의 깊이와 미래의 서사를 잃은 채 ‘현재의 자극’에만 갇혀 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디지털 치매’ 환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