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방송사회자 출신 언어·역사학자 정재환 /사진=김수영 기자
개그맨·방송사회자 출신 언어·역사학자 정재환 /사진=김수영 기자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에 차분하고 편안한 말투까지 1990년대 방송가를 휩쓸었던 정재환이 한글 지킴이로 변신해 한글의 위상을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한경닷컴이 만난 그의 명함에 선명한 '공동대표' 직함. 그는 2000년에 설립한 한글문화연대를 통해 26년째 뚝심 있게 한글 사랑을 실천 중이다.

최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모처에서 만난 정재환은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가 한글날 앞뒤인 9~11월"이라면서 "이 또한 감사한 일이지만, 많은 분이 평소에도 한글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한글날 제정 100주년인 올해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 '한글 역사 이야기'를 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던 역사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시간들, 광복 이후 우리의 언어가 자리를 잡는 과정, 그리고 한류를 타고 전 세계로 뻗어나간 현재 한글의 영향력까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다뤘다.

그간 언어와 역사·문화 등과 관련한 책을 다수 펴냈지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집필에만 1년 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정재환은 "성인들이 읽는 책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더라. 복잡한 내용을 초등학교 3, 4학년 눈높이에 맞추려니 쉽게 써야 하고, 설명도 간결해야 했다"고 말했다.

원고를 두 차례 엎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과연 책을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한글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에 집중하며 돌파구를 찾아냈다. 정재환은 "세종이 어떤 마음으로 한글을 만들었는지, 또 이를 위해 얼마나 지식을 습득하고 갈고닦았는지를 전달하면 되겠더라. 이어 한글을 쓴 여성들의 이야기와 호머 헐버트, 조선어학회 등을 떠올리며 그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한글을 지키려 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왜 어린이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재환은 "어린이들이 우리 말을 날마다 쓰면서 커가고 있지 않나. 우리 말글에 대해 이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말이 있어도 문자가 없어서 한자를 빌려 쓰던 특별한 상황이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 우리 말글이 없어질 뻔한 위기도 있지 않았나. 선조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한글을 쓰고 있다는 역사를 알면 우리 말글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고 답했다.

이어 "지금 어린이들이 쓰는 말이 앞으로의 역사가 될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동안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한글의 역사를 만들어왔다면, 이제부터는 어린이가 한글 역사의 주인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개그맨·방송사회자 출신 언어·역사학자 정재환 /사진=김수영 기자
개그맨·방송사회자 출신 언어·역사학자 정재환 /사진=김수영 기자
정재환의 한글 사랑은 무려 26년째 이어지고 있다. 1979년 개그맨으로 데뷔한 그는 방송사회자로 활약하던 중 뒤늦게 우리말과 한글의 소중함에 눈을 떴다. 그렇게 2000년 한글문화연대를 만들었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도 입학했다. 당시 만 39세의 만학도였다. 이후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며 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대학교수로 많은 학생에게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현재는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와 함께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세종시로 이사해 강의 일정에 맞춰 이곳저곳 바삐 움직이며 지내고 있었다.

정재환은 "삶이 이렇게 확 바뀔 줄 몰랐다"며 웃었다. 그는 "방송을 하다가 우리말이 참 소중하고, 한글이 아주 특별한 글자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방송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말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엔 혼자 책을 읽어가면서 공부했다"고 전했다.

이어 "학부 때까지만 해도 방송 일과 병행했는데 점점 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석·박사 과정으로 가면서는 거의 공부만 해야 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학교에서 강의했다. 성균관대에 10년 가까이 있으면서 삶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방송을 떠나려고 한 게 아니라 떠나는 상황이 됐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삶이 바뀐 것"이라며 미소 지었다.

한글은 세계적으로 과학성을 인정받았고, 이제는 외국인들도 배우고 싶어 하는 언어가 됐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해외 공연에서는 '아리랑'을 떼창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매번 화제가 된다. 정재환은 "내가 어렸을 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라면서 "세계인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이 높고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늘었다. 유학생도 많다. 우리나라에 와서 배울 게 있다는 거고, 우리가 그 정도 발전했고, 나눌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긍심을 느껴도 되는 부분"이라면서 동시에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정재환은 "한국어를 배우는 인구가 늘면 한국어 교재나 교사도 더 필요해진다. 또 과거에는 한글이 새겨진 옷을 촌스럽게 여겼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한글이 아름다운 디자인 요소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한글이 교육에서 나아가, 문화상품으로도 확산할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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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현시점에서 '한글 사랑'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

정재환은 '존중'과 '적극적이고 올바른 사용'을 언급했다. 그는 '한글이 목숨'이라는 말을 남긴 외솔 최현배 선생을 떠올리며 "우리 말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거고, 선조의 문화를 사랑하는 거라고 했다. 한글이 있기에 기록할 수 있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일을 할 수도 있다. 한글을 존중하고 잘 써야 한다"고 밝혔다.

'그럼 한글을 잘 쓰는 게 어떤 것이냐?'고 묻자 정재환은 "쉽게 대답하긴 어렵지만, 결국은 질서를 존중하며 잘 쓰는 것"이라면서 외국어 남용을 피하고 우리말로 대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많이 써야 성숙하고 발전하는 것"이라면서 독서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정재환은 "영상시대이긴 하지만, 그럴수록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음미하고, 자기 생각을 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은 차이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을 밝혔다.

이어 "앞으로 인공지능(AI)이 많은 걸 해 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건 사람이 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말하는 것 역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책을 읽으며 낭독하는 것도 좋다. 말도 갈고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글이 중요한 역사의 유산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 어린이들이 이제 내가 우리 말글의 주인이고, 앞으로의 역사를 쓴다고 생각했으면 합니다. 책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 갔을 때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신당부하신 게 책을 읽으라는 거였죠. 아무리 영상시대가 되어도 책은 읽어야 세상을 넓게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