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방문한 CATL 데브레첸 배터리 모듈 공장. 자동화율이 높아 작업자 대신 물건을 나르는 무인운반차량만 분주히 움직였다.     데브레첸=김우섭 기자
지난달 17일 방문한 CATL 데브레첸 배터리 모듈 공장. 자동화율이 높아 작업자 대신 물건을 나르는 무인운반차량만 분주히 움직였다. 데브레첸=김우섭 기자
지난달 16일 헝가리 남부 도시 세게드의 도심에서 차로 5분 정도 달리자 초대형 공사판이 펼쳐졌다. 서울 여의도와 비슷한 300만㎡ 규모 부지에 들어서는 중국 1위 전기차회사 비야디(BYD)의 공장 건설 현장이다. 올해 말 이 공장이 완공되면 BYD는 유럽에서 27%에 달하는 관세를 완전히 면제받는 첫 번째 중국 승용 전기차회사가 된다. BYD와 같이 중국 기업이 유럽에서 추진 또는 운영 중인 전기차·배터리 공장만 26개에 달한다.

자동차산업 본고장인 유럽에 공장을 세워 시장을 공략하는 중국 기업의 ‘붉은 침탈’이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자국에서 저렴하게 생산해 최저가로 팔던 전략에서 벗어나 유럽 현지에 공장을 지어 무관세로 판매하는 ‘전기차 굴기 2.0’에 들어갔다. 지난달 한국경제신문이 독일과 헝가리, 스웨덴 등 유럽 주요 전기차·배터리 생산 기지를 직접 둘러본 결과다.

세계 1위 배터리회사 CATL과 BYD는 헝가리에 유럽 최대 규모의 배터리, 전기차 공장을 각각 세우고 대(對)중국 관세 폭탄의 우회로를 마련하는 데 분주했다. 지리그룹(독일 프랑크푸르트, 스웨덴 예테보리)과 BYD(헝가리 부다페스트), 샤오펑·샤오미(독일 뮌헨) 등은 연구개발(R&D)·디자인센터를 구축해 유럽 인재를 싹쓸이하고 있다.

전기차 및 자율주행 사업 전환에 실패한 유럽 대표 기업은 코너에 몰렸다. 폭스바겐그룹은 코로나19 이후 최악의 성적표(올 상반기 영업이익률 3.8%)를 받아 든 뒤 10만 명 규모 인력 감축과 차종·생산능력 축소에 들어갔다. 스텔란티스와 포드 등은 유럽 내 생산설비를 중국 기업에 넘겨주고 있다. 킬리안 차바 헝가리자동차협회 회장은 “자동차 등 유럽의 제조업이 무너진 뒤 그 빈자리를 중국 기업이 빠르게 차지하고 있다”며 “한국 기업에도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 배터리 희망' 노스볼트 파산…기술 부족·中 공세에 설자리 잃어
中, CATL 헝가리 데브레첸 공장…수백개 로봇팔로 생산 자동화

지난달 17일 유럽 최대 배터리 산업단지인 헝가리 데브레첸 남부·북서부 경제구역. 한자와 헝가리어로 병행 표기된 도로 표지판 뒤로 세계 7위 배터리 셀 기업 EVE에너지와 분리막 기업 셈코프 등이 줄지어 있었다. 중국의 산업단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다. 단지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이 구역의 ‘대장’인 CATL 배터리 공장이 나타났다. 중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배터리 공장이다. 이곳은 CATL이 관세 부담 없이 유럽 전기차 시장을 직접 공략하기 위해 73억유로(약 11조원)를 투자해 지은 유럽 공략의 전초기지로 꼽힌다.

좌초된 유럽 ‘배터리 자립’ 구상

유럽 제조업이 몰락한 빈자리를 중국이 빠르게 채워나가고 있다. 기술력 부족과 중국의 저가 공세로 유럽 기업이 설 자리를 잃은 배터리 분야가 대표적이다. ‘유럽 배터리의 희망’으로 불리던 스웨덴 노스볼트는 생산 차질과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3월 파산했다. 핵심 자산인 스웨덴 공장과 연구개발 시설은 올해 2월 미국 배터리 기업 라이텐에 넘어갔다. 스텔란티스, 메르세데스벤츠, 토탈에너지가 공동 투자한 배터리 합작사 ACC마저 독일과 이탈리아 공장 건설 계획을 접었다. 유럽의 ‘배터리 자립’ 구상이 깨진 것이다.

세계 1위 배터리 기업 CATL은 이 틈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CATL이 단독으로 짓는 첫 해외 공장인 이곳은 연 배터리 생산량만 100GWh(기가와트시)에 달한다. 총 세 개 공장 중 1공장이 이달 초 가동에 들어갔다. 메르세데스벤츠 등 유럽 완성차 기업에서 수년 치 일감을 선주문받았다.

기자가 방문한 이 회사의 배터리 모듈 공장은 품질 검사 등을 제외한 모든 생산 과정이 자동화돼 있다. 배터리 모듈 생산 라인에 설치된 수백 개의 로봇 팔은 바로 옆 셀 공장에서 넘어온 배터리를 일정 간격으로 모듈 안에 쌓고 있었다. 셀 사이에 전기가 통하지 않도록 용접해 판재를 세우는 것도 로봇 팔이 담당했다. 특수 카메라와 인공지능(AI) 등이 완성된 모듈을 검수했다.

진량 CATL 데브레첸 공장장은 “유럽 근로자의 숙련도가 낮은 것을 감안해 중국보다 자동화율을 더 높였다”며 “중국을 뛰어넘는 최신 시설로 이 시스템을 조만간 중국에 역수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소재부터 셀까지 점령한 中

중국 생산을 고집하던 CATL이 유럽으로 생산 무대를 옮긴 건 유럽연합(EU)의 관세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다. EU는 미국과 달리 중국 배터리회사의 진입 자체를 막지는 않는다. 다만 유럽 내 생산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산업가속화법(IAA) 도입을 앞두고 있다. 전기차는 원칙적으로 EU에서 조립하고, 배터리를 제외한 부품의 70% 이상을 가격 기준으로 역내에서 조달해야 보조금을 준다. 진 공장장은 “추후 EU 수출 제한이나 관세 인상 등의 불확실성을 없애는 거점이 될 것”이라며 “CATL은 유럽에서 만들고, 유럽을 위해 일하며, 유럽의 일원이 되겠다”고 말했다.
"관세 때리자 공장 26개 박았다"…유럽 숨통죄는 中의 공습

中의 유럽 점유율 68% ‘韓 2배’

CATL이 헝가리를 유럽 거점으로 삼은 데엔 이유가 있다. 헝가리와 폴란드 등 인근 국가에서 핵심 소재와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데다 독일 등 자동차 공장 등이 멀지 않아 물류비가 적게 든다. 데브레첸 지역에는 배터리 밸류체인이 밀집돼 있다. 한국 에코프로비엠의 양극재 공장과 중국 셈코프의 분리막 공장 등이 대표적이다. 헝가리 서북부 지역엔 솔루스첨단소재의 배터리용 동박 공장과 솔브레인의 전해액 공장 등이 있다.

인근 폴란드까지 범위를 넓히면 벨기에 유미코어의 양극재 공장 등도 있다. 카데리악 페테르 헝가리배터리산업협회장은 “최근 유럽 전반에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추가로 새 배터리 공장을 허가받는 게 더 어려워졌다”며 “공장을 확보했거나 준비 중인 기업이 확실한 우위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CATL과 같이 유럽에 공장을 짓고 있거나 운영 중인 중국 기업만 14곳에 달한다. 궈시안은 폭스바겐과 손잡고 스페인과 슬로바키아에 총 50GWh 규모 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다. EVE에너지는 헝가리에서 28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 가동에 들어갔다. 중국이 유럽 내에서 운영할 예정인 배터리 셀 공장 규모만 282.8GWh에 이른다. 유럽 터줏대감이던 한국 배터리 3사의 유럽 생산능력(160GWh)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중국의 공세 속에 10년 전만 해도 한국의 텃밭이던 유럽 배터리 시장은 ‘중국 천하’가 됐다. 올해 1~8월 중국 상위 7개 기업의 유럽 시장 점유율은 67.8%로 2023년 41.0%에서 26.8%포인트 상승했다. 한국 배터리 3사 점유율은 같은 기간 55.6%에서 28.7%로 반토막 났다.

세게드=김우섭/예테보리=정상원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