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워시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지난 28일(현지시간) 잭슨홀 미팅 행사장을 걷고 있다. /AFP 연합뉴스
케빈 워시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지난 28일(현지시간) 잭슨홀 미팅 행사장을 걷고 있다. /AFP 연합뉴스
케빈 워시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28일(현지 시간) 첫 잭슨홀 미팅에서 연설문 '우리 시대에(In Our Time)'를 읽었다. 워시 의장이 30분 정도 읽어 내려간 원고지 107매 분량 연설문엔 △인공지능(AI)과 경제 △포워드 가이던스와 중앙은행·시장 간 소통 △통화정책의 핵심 원칙 △경제 상황에 대한 워시 의장의 생각이 담겼다. 이번 연설은 지난 5월 취임 이후 두 차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거치며 워시 의장에게 쏟아진 질타와 비판을 걷어내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Fed 의장으로서의 책임감, 그간 비판에 대한 반박, 유머 등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연설문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다. 논문처럼 주요 주장에 각주를 달고 근거를 밝힌 것이다.

워시, 신 총재 논문 인용해 '포워드 가이던스' 폐지 주장

이날 워시 의장의 발언 중 '백미'로는 Fed가 수십년 이어온 통화정책 수단인 '포워드 가이던스' 폐지에 대한 정당성을 역설한 부분이 꼽힌다. 포워드 가이던스는 중앙은행이 미래 통화정책 방향을 미리 공표하며 시장과 소통하고, 경제 주체들의 금리 예측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금융위기 때 시장 안정화를 위해 본격적으로 도입됐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워시 의장은 취임 이후 위원들이 향후 금리 범위를 전망하는 '점도표'에 점을 찍지 않고 FOMC 회의에서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함구하는 등 '포워드 가이던스 폐지' 약속을 지키고 있다.

워시 의장의 연설 내용 중 일부를 우선 살펴보자.

시장이 Fed의 가이던스에 의존하고 Fed가 시장 가격에 기대 경제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발전에 '눈이 멀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정책 결정에서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이 문단의 각주를 보면 낯익은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다. 워시 의장은 신 총재가 스테판 모리스와 함께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를 통해 2002년 발표한 논문 '공공 정보의 사회적 가치'를 인용했다.
28일 잭슨홀 미팅 현장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신현송 한은 총재 / 한국은행 제공
28일 잭슨홀 미팅 현장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신현송 한은 총재 / 한국은행 제공
워시 의장은 왜 신 총재의 논문을 인용했을까. 이날 워시 의장의 연설 이후 열린 신 총재와의 특파원 간담회에서 얘기가 나왔다. 신 총재의 설명은 이렇다.

워시 의장은 취임 이후 말을 아꼈다. 이날은 이론적인 바탕을 설명한 것이다. 시장과의 '양방향 소통'이 중요한데, 포워드 가이던스가 있으면 시장은 중앙은행 입만 바라보게 된다. 가격 결정이 중앙은행의 가이던스에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면 시장에서의 정보가 시장 가격에 반영이 안 된다. 시장 참여자들은 '중앙은행이 말을 많이 하면 투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말이 많으면 시장 자체의 정보해석 능력이 취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거울의 방'에 들어가면 잘못된 정책 나와

신 총재는 '거울의 방(a hall-of-mirrors)' 이론을 활용해 설명을 이어갔다. 거울의 방은 벽마다 거울이 붙어 있는 방이나 미로를 떠올리면 된다. 한 사람이 서 있으면 그 모습이 여러 거울에 연속해서 반사돼 똑같은 이미지가 끝없이 나타난다. 그러면 어느 것이 실제 사람이고 어느 것이 반사된 모습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예컨대 Fed가 '당분간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포워드 가이던스를 주면, 시장도 금리 동결을 예상하고 가격에 반영한다. Fed 관계자들은 시장 가격을 보고 '시장도 인플레이션 위험을 낮게 판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독립적인 시장정보가 아니라 자기 메시지의 반복을 보고 정책 판단을 하게 되는 셈이다. 신 총재는 이에 대해 "중앙은행과 시장의 자체적인 가격 발견 능력이 없어진다"고 평가했다.

신 총재는 다른 연구 결과도 함께 설명했다. FOMC에서 기준금리 인하를 시사한 날엔 시장 금리도 떨어졌지만, 하루 이틀 뒤엔 회복되는 사례가 많았다는 Fed의 논문이다. 신 총재는 "워시가 이런 이유 때문에 말을 아꼈다"며 "이런 소통의 문제에 대해선 함께 이야기를 오래 했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케빈 워시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 AFP 연합뉴스
케빈 워시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 AFP 연합뉴스
워시는 이날 포워드 가이던스를 '구시대의 유물'로 못박았다. 그는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동료들과 저에 의해 정기적인 관행으로 포워드 가이던스가 채택됐다"며 "하지만 과거 위기의 다른 유산들처럼, 이 관행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미래 정책 결정에 대한 소통의 투명성은 그 자체로 미덕이 아니다"며 "커뮤니케이션은 Fed의 최우선 책임, 즉 통화정책을 올바르게 수립하는 데 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잘못된 소통의 피해 정도는 취약계층이 가장 크다는 게 워시 의장의 진단이다. 그는 "Fed가 인플레이션을 잘못 계산해서 경제를 잘못 판단한다면 성실히 일하는 미국인들의 피해가 커진다"며 "금리 사이클 내내 준(準) 약속을 할 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자유가 제한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명확한 정보'를 얻었다는 확신이 든다면 이를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뜻도 나타냈다.
워시 의장은 "포워드 가이던스가 현재 상황에서 적합하지 않다면, Fed 의장이 최소한 '명확한 반응 기능'을 약속하는 것은 어떨까"라며 "분명히, 데이터가 뜨겁게 나오거나 냉정하게 나오는 상황이 있을 때는 금리 경로를 알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 총재도 "K점도표 다시 검토해볼 것"

워시 의장과 여러 모로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깐부' 신 총재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까. 그 역시 '소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지만, '과도한 관심'은 정책 결정의 노이즈가 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신 총재는 "K점도표는 부정적이지 않지만 1년 뒤에 한 번 평가를 할 것"이라며 "'없앤다, 살린다' 이분법식으로 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물찾기 하듯 의결문 단어 하나 뜯어보고 중앙은행에서 나오는 이런 마이크로 현상까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저도 통화정책방향 간담회 때 '시장에 전달하고자 하는 큰 그림을 봐달라고 당부를 했다'"고 전했다.

잭슨홀=황정수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