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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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에 과학사의 거장 이름을 잇달아 새겨 넣고 있다. 테슬라·파스칼·튜링·호퍼·블랙웰을 거쳐 차세대 플랫폼에는 암흑물질의 비밀을 추적한 천문학자 베라 루빈의 이름을 붙였다. AI가 스스로 코드를 짜고 여러 작업을 수행하는 'AI 에이전트' 시대를 앞두고 엔비디아가 이름에 비밀을 숨겨놨다는 분석이 나온다.

테슬라에서 루빈까지…GPU 이름에 과학사를 담다

29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최근 북미 최대 반도체 학술행사 '핫칩스 2026'에서 베라 루빈 기반의 차세대 AI 팩토리 생태계를 발표했다. 행사에서 공개된 베라 루빈은 72개의 루빈 그래픽처리장치(GPU)와 36개의 베라 중앙처리장치(CPU), 커넥트X-9 슈퍼NIC, 블루필드-4 데이터처리장치(DPU)를 6세대 NV링크 인터커넥트 기술로 묶어 단일 AI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한 플랫폼이다.

쉽게 말해 AI 연산을 담당하는 GPU에 CPU와 데이터 이동을 돕는 반도체를 촘촘히 연결해 수많은 칩이 한 몸처럼 움직이도록 한 '차세대 AI 컴퓨팅 플랫폼'이다.

엔비디아에 따르면 베라 루빈을 AI 에이전트의 코딩 작업을 기록한 벤치마크를 활용해 측정한 결과 전작인 블랙웰보다 1메가와트(㎿) 전력으로 최대 30배 많은 작업을 처리했고, 토큰 100만 개를 생성하는 비용도 최대 35배 낮아졌다.

이번 결과는 단순한 칩 연산 성능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실제로 코드를 작성하면서 측정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엔비디아는 설명했다. AI 에이전트는 검색·코딩·외부 도구 호출 등을 반복하며 일반 AI 대화보다 최대 15배 많은 토큰을 소비하는 만큼 엔비디아는 베라 루빈을 통해 제한된 데이터센터 전력으로 더 많은 AI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흥미로운 건 황 CEO가 차세대 GPU 플랫폼에도 과학자의 이름을 붙였다는 점이다. 세계 최초의 흑인 여성 천문학자인 베라 루빈은 은하의 회전 운동을 연구해 암흑물질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관측 증거를 제시했다.

엔비디아의 GPU 이름을 따라가면 근현대 과학사의 주요 인물들이 한 줄로 늘어선다. 1990년대 말부터 GPU 아키텍처에 과학·수학·컴퓨터과학 분야의 거장 이름을 차례로 사용했다. 셀시어스, 켈빈, 랭킨, 큐리를 거쳐 테슬라, 페르미, 케플러, 맥스웰, 파스칼, 볼타, 튜링, 암페어, 호퍼, 블랙웰, 루빈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전기·물리학자의 이름이 많았다. 테슬라는 교류 전력 시스템과 전자기학 발전에 기여한 니콜라 테슬라에서, 페르미는 핵물리학과 양자통계학에 족적을 남긴 엔리코 페르미에서 따왔다. 케플러는 행성운동 법칙을 정립한 요하네스 케플러, 맥스웰은 전자기학을 수학적으로 체계화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이름이다. 스칼은 수학과 물리학에서 업적을 남긴 블레즈 파스칼, 볼타는 전지를 발명한 알레산드로 볼타에게서 따왔다.

튜링은 계산이론과 컴퓨터과학의 선구자인 앨런 튜링을, 암페어는 전자기학 발전에 기여한 앙드레마리 앙페르를 가리킨다. 이 계보에서 기술적으로 중요한 변곡점은 볼타다. 2017년 공개된 볼타 아키텍처의 V100에는 엔비디아가 처음으로 텐서 코어를 탑재했다. 이는 GPU가 그래픽 처리장치를 넘어 AI와 머신러닝의 행렬 연산을 가속화하는 핵심 컴퓨팅 장치로 진화하는 출발점이 됐다.

호퍼부터는 이름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다. 호퍼는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그레이스 호퍼의 이름이다. 엔비디아는 2022년 호퍼 아키텍처를 공개하면서 그레이스 호퍼를 '개척적인 미국 컴퓨터과학자'라고 명시했다. 호퍼는 초기 프로그래밍 언어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2024년 공개된 블랙웰은 게임이론과 통계학을 연구한 미국 수학자 데이비드 해럴드 블랙웰의 이름을 땄다. 그는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에 선출된 최초의 흑인 학자라는 역사적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슈퍼컴퓨터 ‘베라 루빈 NVL72’. 72개 GPU를 6세대 NV링크로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가속기처럼 작동하도록 설계했다. / 사진=엔비디아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슈퍼컴퓨터 ‘베라 루빈 NVL72’. 72개 GPU를 6세대 NV링크로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가속기처럼 작동하도록 설계했다. / 사진=엔비디아

엔비디아의 넥스트 스텝은 '양자'

엔비디아의 다음 승부처가 블랙웰에서 베라 루빈으로 넘어가고 있다. 블랙웰이 생성형 AI의 폭발적인 연산 수요에 대응해 GPU 성능과 확장성을 끌어올린 세대라면 베라 루빈은 GPU와 CPU, 메모리, 네트워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AI 데이터센터 전체의 효율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 차세대 플랫폼이다.

블랙웰과 루빈의 차이는 '더 빠른 GPU'에서 '더 효율적인 AI 시스템'으로 경쟁의 축이 이동했다는 데 있다. 특히 AI 에이전트 확산으로 추론 수요가 급증하면서 앞으로는 GPU의 최대 연산 성능보다 같은 전력과 비용으로 얼마나 많은 AI 연산과 토큰을 처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와 물리학에서 수학으로, 컴퓨터과학으로, 그리고 다시 우주를 연구한 천문학자로 이어지는 이름의 행렬은 GPU가 다루는 문제의 범위가 얼마나 넓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해석이 많다. 특히 베라 루빈은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찾아내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을 바꾼 인물이다.

AI 시대의 엔비디아가 베라 루빈이라는 이름을 차세대 플랫폼에 붙인 이유도 기존의 컴퓨팅 한계를 넘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 GPU의 이름은 제품명을 넘어 한 세기 넘게 이어진 과학사의 이름을 빌려 GPU가 그래픽 칩에서 AI 시대의 범용 가속 컴퓨팅 플랫폼으로 진화한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기술 연대기"라고 설명했다.

2028년 출시가 예상되는 파인만은 엔비디아가 베라 루빈 다음 세대 아키텍처에 붙인 이름으로,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에서 따왔다. 파인만은 양자전기역학을 발전시킨 공로로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특히 양자 현상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는 문제를 제기하며 양자컴퓨팅의 발전에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진 인물로 평가된다.

엔비디아 역시 최근 양자컴퓨팅을 차세대 컴퓨팅의 한 축으로 보고 관련 연구를 강화하고 있다. 2025년 3월 보스턴에 가속 양자컴퓨팅 연구센터(NVAQC)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GPU 슈퍼컴퓨터와 양자 프로세서를 초저지연으로 연결하는 NVQLink를 공개했다.

황 CEO는 향후 엔비디아의 과학 슈퍼컴퓨터가 양자 프로세서와 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엔비디아가 베라 루빈 다음 아키텍처에 파인만의 이름을 붙인 것은 양자컴퓨팅 시대를 염두에 둔 작명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6월 1일(현지시간)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관련 기조연설에서 차세대 인공지능(AI) 플랫폼 '베라 루빈'을 소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6월 1일(현지시간)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관련 기조연설에서 차세대 인공지능(AI) 플랫폼 '베라 루빈'을 소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