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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국가의 교육격차, 한국에게 '남의 나라 일'이 아닌 이유 [이성득의 아세안 돋보기]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아세안은 세계에서 가장 젊은 지역 중 하나다. 전체 인구 약 6억8000만 명의 중위연령은 30세 안팎이고, 매년 노동시장에 쏟아지는 청년 인구는 글로벌 기업들이 새 공장을 지을 때마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매력 포인트다. 그런데 이 '인구배당'이 축복으로 이어질지는 숫자 하나로는 알 수 없다. 학교에 얼마나 많이 다니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나오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아세안 회원국들의 성적표는 놀랍게도 갈린다.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베트남은 아세안 국가 중 싱가포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81개 참여국·경제권 중 수학 31위, 읽기 34위, 과학 35위다. 절대 점수만 보면 수학 469점, 읽기 462점, 과학 472점으로 OECD 평균을 모두 밑돌고 2012년 첫 참가 이래 가장 낮은 순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성적이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감안해 비교하면 베트남 학생들의 수학 성취도는 홍콩·대만·한국에 이어 최상위권에 해당한다.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이 말레이시아보다 낮은데도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은 말레이시아보다 훨씬 낮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앞서 언급한 지인의 평가가 베트남 인부들을 향한 것이었다면, 적어도 그 배경을 짐작해 볼 단서는 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이 성과가 높은 교육 지출 덕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연구는 베트남이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보다 오히려 적은 교육 예산을 쓰면서도 훨씬 나은 결과를 냈다고 분석하며 그 차이를 제도적 요인과 사회 전반의 교육 우선순위에서 찾는다.
반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그림은 다르다.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2022년 PISA 읽기 점수는 359점으로 OECD 평균(476점)에 크게 못 미쳤고, 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과 함께 아세안 내에서도 낮은 수준(레벨 1a)에 속했다. 더 심각한 건 필리핀이다. 세계은행은 2022년 필리핀의 '학습 빈곤율'—만 10세 아동이 나이에 맞는 짧은 글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비율—을 91%로 집계했다. 같은 조사에서 인도네시아는 53%, 태국은 23%였다.
놀라운 건 필리핀 정부 추정치가 겨우 37%에 그쳤다는 점이다. 세계은행은 인도네시아·라오스·몽골·필리핀·베트남 등 조사 대상 5개국 모두에서 정책 결정자들이 자국 10세 아동의 문해력을 실제보다 크게 낙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냥 잘못 이해하는 것인지 숨기고 싶은 것인지 모르지만,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면 해법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짚어야 할 건 '돈을 더 쓰면 해결된다'는 단순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필리핀은 지난 10년간 교육 예산이 GDP의 3.2% 수준에 머물렀지만 2026년 예산에서 마침내 1조 3500억 페소, GDP의 4.4%를 배정하며 유네스코 권고 기준(4~6%)을 사상 처음 충족했다. 다만 돈을 넣었다고 아이들이 곧바로 글을 읽게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역시 헌법상 국가 예산의 20%를 교육에 배정하도록 못 박아 놓았을 만큼 제도적으로는 교육을 우선시하지만 실제 학습 성과로는 잘 이어지지 않고 있다. 세계은행도 자금 규모보다 교사 역량, 교육 거버넌스, 자원 배분의 효율성이 국가별 교육 성과를 가르는 더 중요한 변수라고 짚는다. 실제로 세계은행 조사에서 필리핀 학생의 40%가 교사가 수업에 결석하는 일을 겪었다고 답했고, 교원 연수 프로그램 중 교과 내용에 초점을 맞힌 비중은 14%에 불과했다. 진학률과 예산 규모라는 '투입'과 실제 아이들이 무엇을 익히고 나오느냐는 '산출' 사이의 괴리, 그것이 아세안 교육 문제의 핵심이다.
이 격차는 단순한 교육 통계가 아니라 아세안이 '중진국 함정'을 벗어날 수 있을지를 가르는 변수다. 반도체·배터리·전자 부품 공급망이 중국을 넘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로 확장되는 '차이나 플러스 원' 흐름 속에서, 다국적 기업들이 요구하는 건 단순 조립 인력이 아니라 숙련도 높은 기술 인력이다. 필리핀 안에서도 학습 빈곤이 이번 세대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져 결국 국가적 비용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경고가 꾸준히 나온다. 학교는 늘었지만, 실력이 못 따라가는 나라는 결국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에 계속 머물 위험이 크다.
여기에 더해 조만간 닥칠 변수가 하나 더 있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생성형 AI(인공지능) 다음은 피지컬 AI'라고 말했듯이, 로봇이 반복적이고 위험한 육체노동을 대신하는 흐름은 이미 현실이 됐다. 국제로봇연맹(IFR)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 세계 공장에서 가동 중인 산업용 로봇은 466만 대로 1년 새 9% 늘었고, 신규 설치의 74%가 아시아에 집중됐다. 현대차그룹만 해도 2026~2030년 국내 투자액 125조2000억 원 중 40%에 해당하는 50조5000억 원을 AI·로보틱스·전동화 등 미래 신사업에 배정하며 피지컬 AI 전용 데이터센터와 응용센터 설립을 예고했다.
문제는 이 전환이 저숙련 노동력에 의존해 온 아세안 국가들에 심대한 타격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로봇이 단순 조립·검사·운반 같은 반복 작업을 흡수할수록 사람에게 남는 몫은 로봇을 감독하고 예외 상황에 대응하며 설비를 유지·보수하는 일이 된다. 이는 정확히 문해력과 수리력, 즉 기초 학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영역이다. 학습 빈곤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값싼 단순노동'이라는 기존의 비교우위가 로봇에 잠식당하는 동시에, 그다음 단계의 일자리로 올라설 준비도 안 돼 있는 복합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뜻이다.
아세안 각국의 교육 격차는 남의 일이 아니다. 국내 중소 제조업 현장의 인력난을 메워주는 고용허가제(EPS)는 현재 17개국과 인력 송출 협정을 맺고 있고, 베트남·인도네시아·필리핀은 주요 송출국이다. 2025년 한 해 도입 계획 인원은 13만 명 규모였으며, 업종별로는 제조업 비중이 가장 컸다. 이들은 입국 전 EPS-TOPIK이라는 '산업현장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시험이 요구하는 건 단순 어학 능력이 아니라 안전 수칙과 작업 지시를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최소한의 문해력·수리력이다. 그렇다면 송출국의 기초학력 수준이 한국 공장으로 들어오는 인력 풀의 성격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기초 문해력이 취약할수록 현장 적응이나 안전 교육에서 한국 사업주가 떠안는 관리 부담도 그만큼 커질 수 있다.
이 문제에서 한국은 단순한 원조국이 아니라 이해당사자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베트남에 세운 한국-베트남 정보통신기술 대학교(VKU)는 기술 직업훈련(TVET·Technical and Vocational Education and Training) 및 고등교육 협력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고, 한국폴리텍대학도 여러 개도국에 '한국형 직업 기술교육(K-TVET)' 모델을 전수해 왔다. 여기에 더해 KOICA가 베트남·인도네시아 등을 대상으로 국내 체류 외국인력과 연계하는 산업인력 양성 사업을 추진해 온 만큼, 이런 틀을 확장하면 EPS로 들어오는 인력의 기초 역량을 출국 전 단계에서부터 끌어올리는 장치를 만들 수 있다. 즉 아세안 교육 투자를 그저 대외원조 예산 항목으로 볼 게 아니라, 한국 제조업 노동력 공급망의 품질관리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최근 인력 수요 둔화를 이유로 E-9 쿼터를 2025년 13만 명에서 2026년 8만 명으로 줄이고 단순노무보다 숙련·기술 인력 중심으로 정책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들어오는 인력의 '양'이 줄고 '질'에 대한 요구는 오히려 커지는 흐름 속에서, 한국의 아세안 투자는 도로나 공장 건설이 아니라 송출국 교실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단계부터 시작돼야 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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