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모습 사진=한경DB
여의도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모습 사진=한경DB
최근 목동과 여의도 등 주요 재건축 단지에서 신탁방식 정비사업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조합을 설립하지 않고 신탁사가 사업시행자가 돼 재건축을 이끄는 방식입니다. 복잡한 조합 설립 절차를 줄일 수 있고 전문적인 사업 관리와 자금 조달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힙니다.

신탁방식을 선택했다고 사업이 저절로 빨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탁보수와 계약 해지 사유, 주민의 의사결정 권한, 정보 공개 범위가 어떻게 정해지는지에 따라 사업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탁사가 누구를 사업 참여자로 인정할 것인지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부분입니다.

최근 대법원은 신탁업자가 사업시행자인 재건축사업에서 누가 '위탁자'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한 판결을 내놨습니다(대법원 2025. 2. 20. 선고 2024두52427 판결).

사건은 1983년 신축된 한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아파트 상가 지하층은 구조상 여러 점포로 나뉘어 사용됐지만 개별 점포에 대한 구분등기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점포 소유자들은 등기부상 공유지분을 매매하는 방식으로 거래했습니다.

이후 신탁사가 재건축사업의 사업시행자로 지정됐습니다. 신탁사는 상가 지하층 소유자들을 위탁자 명단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정비구역 지정 고시 이후에 구분등기를 마쳤고 신탁사와 개별 신탁계약도 체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소유자들은 자신들도 재건축사업의 위탁자에 해당한다며 지위 확인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은 이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정비구역 지정 당시 각 점포에 관한 구분등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항소심 판단은 달랐습니다. 대법원도 원고들의 위탁자 지위를 인정한 항소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습니다.

먼저 대법원은 신탁업자가 사업시행자인 재건축사업에서 토지 등 소유자가 자신의 위탁자 지위를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조합방식 재건축에서 조합원 지위 확인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탁방식에서도 사업 참여자의 지위를 다툴 수 있는 길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탁자'가 반드시 신탁사와 개별 신탁계약을 체결한 사람만을 의미하는지도 쟁점이 됐습니다.

대법원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제39조 제1항 전문에서 정한 위탁자에는 신탁업자와 신탁계약을 맺은 토지 등 소유자뿐 아니라 사업시행자 지정에 동의한 토지 등 소유자도 포함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원고들이 개별 신탁계약을 맺지 않았거나 신탁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위탁자 지위를 부정할 수 없다는 취지입니다.

상가 점포의 구분소유권이 언제 성립했는지도 중요했습니다. 원고들의 점포는 건물이 신축될 당시부터 벽체 등으로 구분돼 구조상 독립성을 갖췄습니다. 각 점포는 별도로 사용됐고 개별적으로 거래됐습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사정을 토대로 정비구역 지정 고시 이전에 구분소유권이 성립했다고 본 원심 판단을 받아들였습니다. 구분등기가 늦게 이뤄졌다는 형식만으로 점포 소유자의 실질적인 권리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번 판결은 신탁방식 재건축에서 위탁자의 범위를 단순히 신탁계약 체결 여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사업시행자 지정에 동의했는지와 해당 부동산에 실질적인 구분소유권이 성립했는지 등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신탁방식은 신탁사의 전문성과 자금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업 진행 과정에서 토지 등 소유자가 자신의 권리를 어느 범위까지 행사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계약이나 등기 형식만을 앞세워 사업에 동의한 소유자의 지위를 배제한다면 또 다른 분쟁이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토지 등 소유자도 사업시행자 지정 동의서를 단순한 찬성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동의서는 자신의 재산권과 향후 사업 참여 여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서입니다. 동의서를 제출하기 전 위탁자 인정 기준과 분양신청권, 의사결정 구조 등을 확인해야 합니다.

구분등기가 불분명한 상가와 집합건물의 일부를 소유했다면 권리를 입증할 자료도 확보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매매계약서와 도면, 점포의 구조와 이용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관리비와 공과금 납부 내역 등이 분쟁 과정에서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신탁계약서에는 신탁보수만 담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민에게 어떤 정보를 언제 공개할 것인지, 주요 의사결정에 주민 의견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신탁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사유는 무엇인지도 함께 정해집니다. 신탁사의 전문성을 활용하면서 주민이 사업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계약에 구체적으로 담아야 합니다.

재건축은 낡은 건물을 새로 짓는 사업에 그치지 않습니다. 토지 등 소유자의 재산권과 사업 참여자의 지위가 새롭게 정해지는 과정입니다. 사업 속도를 높이겠다는 이유로 소유자의 실질적인 권리를 형식적인 계약과 등기 뒤로 밀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 판결은 신탁방식 재건축에서도 계약의 형식보다 사업 참여 의사와 실질적인 권리관계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탁방식을 검토하는 단지라면 어느 신탁사를 선택할 것인지에 앞서 누가 위탁자로 인정되고 그 권리가 어떻게 보호되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조선규 법무법인 조율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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