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숨결' 2부에서 노래하는 테너 김재형과 소프라노 박소영 / 당진문화재단 제공.
'거장의 숨결' 2부에서 노래하는 테너 김재형과 소프라노 박소영 / 당진문화재단 제공.
11일 충남 당진문예의전당 대공연장. 테너 김재형의 데뷔 30주년 초청 독창회 '거장의 숨결'은 제목 그대로 한 성악가가 쌓아온 시간의 무게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현장을 찾은 관객을 가장 먼저 압도한 것은 프로그램이었다.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에서 구노, 칠레아, 마스카니, 베르디,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아리아까지. 한 명의 테너가 리트와 오페라를 오가며 자신의 음악적 이력을 펼쳐 보인 무대였다.

테너 김재형은 국제 무대에서는 알프레드 킴(Alfred Kim)으로 통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빈 슈타츠오퍼, 뮌헨 국립오페라,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베를린 국립오페라, 이탈리아 라 스칼라 등 세계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활동해온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드라마틱 테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테너의 영역은 음색과 배역의 성격에 따라 리릭 테너, 스핀토 테너, 드라마틱 테너 등으로 나뉜다. 그중 드라마틱 테너는 큰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가는 강한 투사력, 두터운 중음역, 극적 상황을 장악하는 발성적 밀도를 요구받는 성부다. 베르디의 오텔로, 푸치니의 칼라프처럼 비극과 영웅성을 동시에 짊어지는 배역들도 이 영역에 속한다.
'거장의 숨결' 1부에서 '시인의 사랑'을 노래하는 테너 김재형 / 당진문화재단 제공.
'거장의 숨결' 1부에서 '시인의 사랑'을 노래하는 테너 김재형 / 당진문화재단 제공.
1부는 절제의 시간이었다. 김재형은 피아니스트 황지희와 함께 슈만의 대표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노래했다. 하이네의 시에 슈만이 음악을 붙인 이 작품은 사랑의 설렘과 상실, 고독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독일 낭만주의 가곡의 정수다. 김재형은 일반적인 테너들의 <시인의 사랑> 무대보다 한결 느리게 느껴지는 템포로 노래했다. 한 음 한 음을 꾹꾹 눌러가며, 긴 호흡으로 시(詩)를 읊어냈다.

대극장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해온 드라마틱 테너였지만, 이 무대에서 그는 성량을 과시하지 않았다. 슈만의 예술가곡에 발성적 에너지를 싣지 않았다. 표현으로 감정을 강요하기보다 여운이 오래 머물게 했다. 거대한 오페라극장을 뚫고 나가는 소리의 주인공이 아니라, 한 편의 시를 관객 앞에 낭독하는 성악가로 무대에 섰다.
'거장의 숨결' 2부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노래하는 테너 김재형 / 당진문화재단 제공.
'거장의 숨결' 2부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노래하는 테너 김재형 / 당진문화재단 제공.
2부는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중 로미오의 아리아 '아, 떠오르는 태양이여', 칠레아의 <아를르의 여인> 중 '페데리코의 탄식', 베르디 <오텔로>의 주요 장면, 마이어베어 <아프리카의 여인> 중 바스코 다 가마의 아리아 '오 낙원이여'가 이어졌다.

1부가 발성의 절제와 시적 표현에 집중한 무대였다면, 2부는 김재형 특유의 압도적 볼륨이 공연장을 가득 채운 시간이었다. 소리를 밀어붙이는 힘만이 아니라, 극적 상황을 단숨에 성량으로 장악하는 오페라 가수의 본능이 살아났다.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소프라노 박소영도 무대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아리아와 베르디 <오텔로> 중 데스데모나와 오텔로의 이중창에서 김재형과 호흡을 맞췄다. 두 성악가는 피아노 반주만으로도 오페라 한 장면의 긴장과 밀도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바이올린 3대, 비올라 1대, 첼로 2대로 구성된 현악 앙상블이 더해져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인터메조를 연주했고, <오텔로>와 <아프리카의 여인> 무대에서는 피아노 반주 위에 주요 오케스트라 선율을 보탰다. 리사이틀 형식 안에서도 오페라의 색채와 품격을 살리려는 기획력이 돋보였다.
'거장의 숨결' 2부에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박소영 / 당진문화재단 제공.
'거장의 숨결' 2부에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박소영 / 당진문화재단 제공.
공연의 마지막은 한국 가곡이었다. 김재형은 앙코르로 현제명 시, 현제명 곡의 '고향생각'을 속삭이듯 불렀다. 공연 뒤 만난 그는 "한 달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좋아했던 곡이라 마음에 남아 앙코르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대극장을 가득 채우던 드라마틱 테너의 소리는 마지막 순간 가장 낮고 사적인 기억으로 돌아왔다. 그 장면은 이날 공연이 단순한 기교의 과시가 아니라, 한 성악가의 삶과 시간이 겹쳐진 무대였음을 증명했다.

김재형은 여전히 도전하는 성악가다. 그는 2027년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라 스칼라 오페라에서 존 아담스 오페라 <닉슨 인 차이나>에서 '마오쩌둥' 역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이 작품은 존 애덤스의 첫 오페라로,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소재로 한 20세기 현대 오페라의 대표작 중 하나다. 마오쩌둥 역은 강한 고음보다 극적 존재감과 음성의 압도감이 요구되는 배역이다.

독일 오페라의 상징인 바그너에도 도전한다. 바그너의 테너 배역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드라마틱 테너와 또 다른 차원의 지속력과 내구성을 요구한다. 바그너 오페라의 테너는 독일어로 '영웅적 테너'를 뜻하는 '헬덴 테너'라 부른다. 어두운 중음역, 강한 성량, 긴 시간 대편성 오케스트라 위에서 버티는 체력과 무대 장악력을 필요로 한다. 김재형은 이제 바그너의 지그프리트에 도전하며 헬덴테너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길목에 서 있다.
'거장의 숨결' 2부에서 노래하는 테너 김재형 / 당진문화재단 제공.
'거장의 숨결' 2부에서 노래하는 테너 김재형 / 당진문화재단 제공.
그는 이날 공연에서 슈만의 내면, 베르디의 비극, 바스코 다 가마의 희열, 그리고 한국 가곡의 서정성을 한 무대에 올렸다. ‘거장의 숨결’이라는 타이틀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량의 크기보다, 30년을 무대에서 버틴 목소리가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를 상징한 제목이었다.

이번 공연은 지역 공연장의 기획 공연의 가능성도 보여줬다. 이시영 당진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은 “토요일 오후인데도 서울과 전국에서 당진을 찾아준 관객들이 많아 놀랐다”며 “11월 선보이는 연광철의 ‘거장의 숨결’에도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공연을 보기 위해 당진을 찾은 최대원 평택아트센터 본부장도 “한국 성악가들의 실력은 이제 세계적 수준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수도권뿐 아니라 광역 문화예술 단체 기획자들이 거장급 성악가들의 리사이틀을 확대 공급해야 관객 수요도 함께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