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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 김승직 "고음만 생각하다가 '가사의 힘' 깨달았죠"
18일 세종체임버홀에서 유럽 진출 후 첫 국내 독창회
쾰른서 경력 단절위기... 린츠 거쳐 하노버 국립오페라 입성
프리츠 분덜리히 오마주한 '시인의 사랑' 리사이틀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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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테너 김승직(37)은 유럽 무대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을 '소리 너머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는 아름다운 음색과 고음, 발성 테크닉이 노래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극장에서 수많은 리허설과 공연을 경험하며 생각이 달라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저도 좋은 소리와 높은 음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동은 큰 소리나 고음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소리가 주는 감동은 순간에 그칠 수 있지만, 말과 감정이 제대로 전달돼야 긴 여운이 남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이름은 독일의 전설적인 리릭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다.
"분덜리히의 노래는 제게 거의 완벽하게 들립니다. 목소리가 아름답고 테크닉이 훌륭해서만은 아닙니다. 억지로 감정을 만들어내지 않는데도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죠. 따뜻하고 순수하면서 전달력이 있습니다."
김승직은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입학시험 면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성악가로 분덜리히를 꼽았다"고 했다. 이번 독창회의 1부도 분더리히가 남긴 음반과 주요 레퍼토리에서 곡을 골랐다. 공연 전체가 그가 오랫동안 동경해온 테너를 향한 오마주인 셈이다.
그가 택한 이번 '시인의 사랑'의 핵심은 격렬한 감정의 분출보다 절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감정을 얼마나 많이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소리와 감정을 어떻게 절제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선율 뒤에 슬픔이 있고, 밝게 들리는 순간에도 불안과 냉소가 숨어 있습니다. 그 감정을 모두 밖으로 드러내면 오히려 작품이 평면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슈만이 곡을 붙인 '시인의 사랑'은 사랑의 설렘에서 시작해 실망과 질투, 냉소와 자기연민을 거쳐 이별에 이르는 한 남자의 내면을 그린다. 김승직은 이 작품의 화자를 영웅적인 연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곡 '오래되고 불길한 노래들'을 절망이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로 해석한다. 화자는 자신의 사랑과 고통을 거대한 관 속에 넣어 바다에 가라앉혀 달라고 말한다. 김승직은 이를 화자 자신이 무너지는 장면이 아니라, 지나간 사랑을 묻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으로 바라본다.
"마지막에는 '내 사랑과 고통을 그 안에 넣었다'고 노래합니다. 저는 화자가 죽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관에 묻고 희망을 향해 가는 쪽으로 생각합니다. 노래가 끝난 뒤 이어지는 긴 피아노 후주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과 그 이후의 시간을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쾰른에서의 계약이 끝난 뒤에는 다음 무대를 장담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왔다. 유럽의 레퍼토리 극장 시스템에서 한 번 정규 계약의 흐름이 끊기면 다시 앙상블(솔리스트)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김승직은 다시 오디션장에 섰다. 절치부심 끝에 2023~2024시즌 오스트리아 린츠주립극장에 합류했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의 알프레드,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의 알마비바 백작, <마술피리>의 타미노 등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2025~2026시즌부터 독일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의 정규 앙상블로 활동중이다. 오페라스튜디오에서 출발해 쾰른의 정규 단원으로 올라선 뒤, 경력이 멈출 수 있었던 고비를 넘어 린츠와 하노버로 활동이 이어진 것이다.
더욱이 하노버는 약 200년 동안 '가장 표준에 가까운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라는 명성을 지녀왔다. 독일인들의 인식 속에서 하노버는 표준 독일어를 쓰는 도시다. 그 도시의 국립오페라에서 한국인 테너가 정규 앙상블로 활동한다는 사실은 김승직이 지난 5년 동안 쌓아온 언어적·음악적 적응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역시 "독일 생활을 통해 사전에서 배운 뜻과 실제 무대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뉘앙스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결국 모든 것이 시에서 출발합니다. 아름다운 소리도 중요하지만 독일어 단어 하나를 어떤 순간에, 어떤 감정으로 읊어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악적 색깔을 갖습니다.”
"오페라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요소가 많지만 리트에서는 제가 가진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무대 장치 없이 시와 음악, 피아노와의 대화만으로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두 장르의 목표는 같습니다. 관객에게 진실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김승직은 2014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리스트에 올랐고, 2016년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를 차지하며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만 25세였던 2015년 서울시립오페라단 <파우스트>의 타이틀롤로 국내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그의 무기는 따뜻한 미성과 유연한 고음이었다.
"좋은 목소리를 가진 테너로 기억되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이야기를 전하는 성악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분들이 노래가 아름다웠다는 생각을 넘어 그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고 느끼신다면 가장 행복할 것 같습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