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오랫동안 글로벌 공급망의 ‘갑(甲) 중 갑’이었습니다. 전 세계 부품업체를 경쟁시키고, 압도적인 브랜드 파워와 가격 결정력, 대량 구매를 무기로 원하는 가격에 칩과 부품을 사왔습니다. 십수년 간 납품 업체들은 애플 주문을 따내기 위해 마진을 양보하다 적자의 늪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반도체 3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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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애플이 최근 "메모리 가격이 너무 올라 어쩔 수 없다"며 맥북과 아이패드 가격을 최대 25% 올렸습니다. 애플마저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메모리 제조사에 가격 결정력을 넘겨줬다는 방증입니다. 팀 쿡 애플 CEO는 최근의 메모리값 급등이 유례가 없는 일이라면서 “100년 만의 홍수”에 비유하기도 했는데요.

그럴 만합니다. 메모리가 인공지능(AI)의 성능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병목으로 부상하면서 수요가 폭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이제 메모리는 보조 부품에서 AI 생태계 내의 전략 자산으로 진화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이크론이 보여준 기록적인 '총마진 84.6%'는 지금의 메모리 공급 부족이 얼마나 구조적인지 보여줍니다.

모건스탠리는 "메모리 시장은 단순한 경기 순환적 상승기가 아니라 장기적인 공급·수요 균형이 근본적으로 리셋되는 단계에 진입했다"며 "이 시장의 구조적 병목 때문에 메모리 가격은 시간이 지나도 저렴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비싸지며 구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애플은 메모리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 창신메모리(CXMT)의 메모리를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사실 CXMT의 D램은 생각하는 것만큼 저렴하지 않습니다. 업계에선 메모리 3사 제품과의 가격 차이가 5~10% 정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성능 차이까지 고려하면 중국 칩을 산다고 엄청난 원가 절감이 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이 계획의 더 큰 장애물은 정치적 지형입니다. 애플은 지난 2022년에도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 양쯔메모리(YMTC)의 낸드플래시 칩 사용을 추진하다 미국 의회의 강한 반발을 맞고 물러선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복잡합니다.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견제하고 미국 반도체 공급망 부활을 독려하는 트럼프 정부 정책, 중국 내수 시장의 AI 데이터센터 수요까지 고려하면 애플의 중국산 칩 구매 계획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아보입니다. 결국 이는 AI 위주로 재편되는 메모리 공급망에서 애플같은 '갑 중 갑'마저 선택지가 얼마나 좁아졌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적은 CAPEX, 높은 현금흐름' 조합 끝

지난 반년 간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알파벳, 아마존, 메타, 엔비디아, 테슬라 등 '매그니피선트 7'은 주가가 8.7% 하락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반도체 ETF SOXX는 93% 올랐고, 메모리 반도체만 담은 DRAM ETF는 지난 4월 초 상장 후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159% 급등했습니다.
최근 한 달 매그니피선트7 ETF는 하락한 반면 반도체·메모리 ETF는 급등했다.
최근 한 달 매그니피선트7 ETF는 하락한 반면 반도체·메모리 ETF는 급등했다.
이런 주가의 괴리가 앞으로도 계속될지, 이제 반전이 시작될지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AI는 지난 20년간 빅테크의 황금기를 가능케 한 사업 환경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엔비디아, 테슬라 등 혁신 테크 기업을 초기에 발굴하고 투자해온 제임스 앤더슨 전 베일리기포드 운용역은 “미국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대형주의 20년에 걸친 이례적 성장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당장 빅테크가 무너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처럼 자본지출(CAPEX)은 적게, 현금흐름은 풍부하게 유지하면서, 그 현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며 주가를 끌어올리던 구조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제임스 앤더슨 전 베일리기포드 운용역은
제임스 앤더슨 전 베일리기포드 운용역은 "미국 빅테크의 황금기가 끝나간다"고 주장했다. 자료=파이낸셜타임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메타 등이 장악한 검색·광고·소프트웨어·플랫폼 사업은 한 번 깔아두면 추가 설비투자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특히 소프트웨어는 사용자를 추가로 받는 데 드는 한계비용이 사실상 '제로'에 가깝습니다. 애플도 독보적인 iOS 생태계를 구축했지만 제조 공급망은 아웃소싱해 자체 설비투자 부담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빅테크의 가장 큰 유형자산은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AI 경쟁은 이 구조를 송두리째 흔듭니다. AI 모델을 훈련하고 서비스하려면 GPU, 메모리, 데이터센터, 전력망 같은 물리적 인프라에 투자해야 합니다. 모두 어마어마한 투자가 필요한 고정자산입니다. AI 시장이 커지고 서비스를 확장할수록 이 투자 규모는 더 커집니다. 사용자가 늘어나면 토큰과 전력 비용도 늘어나고, 더 많은 인프라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AI는 소프트웨어처럼 쉽게 복제하고 확장할 수 없는, 가장 자본집약적인 인프라 산업입니다.
AI 설비투자 급증으로 5대 하이퍼스케일러의 잉여현금흐름이 급락했다. 자료=노무라증권
AI 설비투자 급증으로 5대 하이퍼스케일러의 잉여현금흐름이 급락했다. 자료=노무라증권
그래서 AI 하이퍼스케일러로 변신한 빅테크들은 이제 유례 없는 규모로 설비투자를 벌이고 있습니다. 쌓아둔 현금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동시 고정자산이 쌓이면서 자기자본이익률(ROE)은 빠르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잉여현금흐름 압박과 감가상각비 증가, 부채·리스·지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 부담은 주식시장에서 빅테크의 밸류에이션을 재평가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한때 AI 테마의 중심이었던 매그니피선트7은 AI 투자 수익화에 대한 의구심, 경쟁 심화에 대한 압박을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반면 메모리와 반도체 장비, 전력과 네트워크 같은 '물리적 병목' 기업들은 이례적인 이익 성장을 누립니다.

메모리 사이클의 변화

물론 메모리 반도체가 경기 순환 산업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마진이 최고조에 달할 때면, 반도체의 매출 대비 주가는 결국 조정을 받았습니다. 증설로 공급 부족이 완화되거나, 고객이 더는 높은 가격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 메모리 업황은 다시 꺾일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언젠가는 그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이클은 그 모양이 과거와는 다를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메흐로트라의 말처럼, AI라는 유례 없는 사이클을 만나 반도체가 전략 물자처럼 취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 물자는 비싸다고 안 사거나, 쉽게 우회할 수 없습니다.

앤더슨은 "반도체 사이클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일"이라면서도 "그 사이클이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서프라이즈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합니다. 업황의 사이클 자체는 인정하지만, 과거처럼 급격한 공급 과잉과 가격 붕괴가 나타날 가능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월가는 5대 하이퍼스케일러의 잉여현금흐름이 2028년 이후 다시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자료=BCA리서치
월가는 5대 하이퍼스케일러의 잉여현금흐름이 2028년 이후 다시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자료=BCA리서치
메모리를 사가는 하이퍼스케일러의 현금 소진 위험에 대해서도 월가는 '단기적으로는 우려, 중기적으로는 괜찮을 것'이라는 분위기입니다. 2028년쯤부터는 AI 매출이 늘어나는 속도가 투자 비용을 현저히 앞지르면서 현금흐름이 빠르게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현재 컨센서스입니다.
익스포넨셜뷰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AI 기업들의 분기 AI 매출이 데이터센터 투자에 따른 감가상각비를 처음으로 넘어섰다고 분석했다. 자료=블룸버그
익스포넨셜뷰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AI 기업들의 분기 AI 매출이 데이터센터 투자에 따른 감가상각비를 처음으로 넘어섰다고 분석했다. 자료=블룸버그
리서치 회사 익스포넨셜뷰도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AI 기업 1000여곳을 조사한 결과, AI로 벌어들인 매출이 데이터센터 투자의 감가상각 비용을 상당 부분 커버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습니다. 'AI는 이미 돈이 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입니다.

AI가 바꾸는 돈의 방향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산업 전환의 과정입니다. 애플이 메모리 가격 급등에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중국산 D램까지 찾아나선 사건은 그 변화의 한 장면에 불과합니다. 애플이 최대 고객사였던 공급망 기업들에도 애플의 비중은 더 이상 과거만큼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애플의 최대 협력사로서 스마트폰 매출이 가장 많았던 폭스콘은 이제 엔비디아의 AI 서버로부터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습니다. 메모리 회사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빅테크는 AI 시대에도 '매그니피선트(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처럼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 무형의 지적자산으로 승부하며 몸집이 가벼운 기업만으로는 더 이상 남을 수 없습니다. '자본집약적 AI 기업'으로 체질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빅테크 사이에서도 승패가 갈리고, 새로운 강자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대체 가능한 납품업체'로 취급됐던 하드웨어 업체들은 그 기술적 해자를 강화한다면 AI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이전보다 구조적으로 높은 멀티플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앤더슨과 함께 16억달러 규모 펀드를 굴리고 있는 모건 새밋은 "가격 결정력은 결국 누군가 '안 된다'고 말할 때까지 가격을 계속 올릴 수 있는 능력"이라면서 "지금은 그 누구도 (반도체의 가격 상승에) 안 된다고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배적 하드웨어 업체들은 이 덕분에 앞으로 더욱 유리한 위치를 굳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AI 시대 질문은 '반도체냐 빅테크냐'가 아닙니다. 아직 정해진 결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핵심은 이제까지 익숙했던 산업의 구조와 주가 평가의 논리가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구조적인 병목의 위치에서 가격 결정력을 행사하는지, 비싸진 인프라 비용을 고객에게 전가할 수 있는지, AI 수요를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매출로 전환해 막대한 투자의 수익을 숫자로 보여줄 것인지에 따라 앞으로의 승패과 기업간 관계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뉴욕=빈난새 특파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