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인공지능(AI) 반도체 붐의 중심에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1년 간 500%, SK하이닉스는 1000% 뛰었고, 코스피도 200% 급등해 전 세계 주식시장을 통틀어 상승률이 압도적인 1위입니다. 월스트리트와 외국인 투자자들은 뒤늦게 한국 반도체와 제조업을 '재평가' 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코스피의 12개월 목표치를 8000으로 제시했던 골드만삭스는 5월 9000, 최근 12000으로 줄상향했습니다.

그런데 원화 가치는 연일 하락하고 있습니다. 4일(미국 동부시간) 달러원 환율은 1532원 안팎에서 거래됐습니다. 한때 1540원까지 치솟기도 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이후 환율이 1500원대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머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삼전·하닉 사도 원화는 안 사"…치솟는 환율, 무슨 일이 [빈난새의 빈틈없이월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원화 강세에 베팅했던 외국인 투자자와 외환시장 트레이더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반도체 수출과 무역 흑자 규모가 급증하고, 주식시장이 활황을 보이면 원화 수요도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수출 비중이 높은 경제에선 경상수지 흑자가 통화가치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과거에도 반도체 사이클이 호황일 때 경상수지 흑자, 코스피 상승, 원화 강세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곤 했습니다.

이번엔 다릅니다. 코스피는 유례 없는 AI 반도체 호황을 따라 급등했지만, 원화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빈난새의 빈틈없이월가>에서는 왜 코스피와 원화의 동조화가 깨졌는지, 환율 1530원대 뒤에서 돈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골드만삭스의 최신 환율 전망과 환율 흐름을 반전시킬 촉매는 무엇이 있을지 짚어봤습니다.
2026년 이후 5월까지 달러 대비 아시아 통화 가치 변동률. 한국 원화는 인도네시아 루피아, 인도 루피, 필리핀 페소에 이어 네 번째로 가치 하락폭이 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막대한 무역흑자에도 원화 가치가 급락한 것이 이례적이라고 조명했다. 자료=FT
2026년 이후 5월까지 달러 대비 아시아 통화 가치 변동률. 한국 원화는 인도네시아 루피아, 인도 루피, 필리핀 페소에 이어 네 번째로 가치 하락폭이 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막대한 무역흑자에도 원화 가치가 급락한 것이 이례적이라고 조명했다. 자료=FT
이란 전쟁발 에너지 충격과 지정학적 리스크는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요인입니다.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고요. 핵심은 외국인 자금의 움직임입니다. 최근 글로벌 펀드들은 반도체주와 코스피의 역사적인 급등 이후 분산투자 규정에 걸려 기계적으로 비중을 줄이고 있습니다. 외국인 자금이 주식을 팔면서 원화를 달러로 바꿔 나가면 환율에는 상승 요인이 됩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JP모건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에 투자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환 헤지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주식은 사고 싶지만, 원화 가치 하락 위험까지 함께 떠안고 싶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환 헤지는 일종의 ‘환율 보험’입니다. 나중에 원화를 다시 달러로 바꿀 때 적용할 환율을 미리 정해두는 계약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실상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수요가 생깁니다. 한국 주식 매수가 원화 강세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런 환 헤지는 2022년 미국 기준금리가 한국보다 높아진 이후 더 활발해졌다고 합니다. 달러를 보유한 투자자 입장에선 환율 변동 위험을 줄이면서 한국 우량주에 투자할 수 있고, 금리 차에서 생기는 캐리 수익(이자 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캐리 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통화를 빌리거나 보유하고, 금리가 높은 통화 쪽 수익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JP모건은 이 때문에 원래 신규 투자 자금에만 환 헤지를 하던 외국인 투자자들도 최근에는 이미 보유한 한국 주식 잔고에 대해서까지 헤지를 늘리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코스피가 오를수록 외국인의 한국 주식 평가액도 커지고, 그만큼 헤지해야 할 원화 노출도 늘어납니다. 주가 상승이 오히려 추가적인 원화 매도 수요를 만드는 역설적인 구조가 생기는 셈입니다.

더 구조적인 문제는 이른바 ‘D램 달러’ 현상입니다. 브래드 세처 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은 산유국들이 막대한 달러 수익을 미국 국채나 달러 자산에 재투자하는 ‘페트로 달러’처럼, 한국이 D램과 메모리칩을 팔아 벌어들인 경상수지 흑자를 원화로 바꾸는 대신 해외 생산 및 운영, 글로벌 투자 등을 위해 달러 그대로 보유하거나 달러 자산에 재투자하고 있다면서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반도체 호황으로 번 돈이 국내에서 원화 수요를 만들지 못하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가는 셈입니다. 미국에 대한 3500억 달러 투자 계획도 미래 달러 수요를 만드는 요인입니다.

한국은행도 이미 2015년부터 경상수지 흑자와 원화 강세의 상관성이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무역흑자의 훨씬 더 많은 비중이 가계, 기관투자자 등 민간의 해외 투자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에 대한 높은 의존도, 고령화에 따른 잠재 성장률 둔화 등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국내외 투자자들은 앞으로도 더 높은 수익률을 좇아 바깥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JP모건은 "한국 시장은 소수의 기술 기업 외 매력적인 투자 대안이 부족하다"면서 "달러가 약세로 전환하지 않는 한 AI 붐만으로 원화 강세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고 원화가 영원히 약세라는 뜻은 아닙니다. RBC 캐피털은 경제 펀더멘털과 누적된 환전 수요 등을 고려할 때 원화가 강세로 돌아서기 시작하면 그 속도가 매우 가파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흐름의 전환을 만들어낼 촉매가 무엇일지, 언제 실현될지입니다.

뉴욕=빈난새 특파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