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끼리 연결되는 가치를 느린 속도로 담아낸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   티캐스트 제공
사람들끼리 연결되는 가치를 느린 속도로 담아낸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 티캐스트 제공
네덜란드의 어느 슈퍼마켓에는 ‘대화형 계산대(Kletskassa)’가 있다. 빠른 처리를 원하는 소비자가 줄을 서는 셀프계산대 바로 옆, 서두를 필요 없이 계산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마련된 창구다. 디지털 자동화의 물결 속에서 역방향을 택한 이 실험은 생각보다 인기를 끌었다. 특히 고령층 사이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짧은 대화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하루 중 유일한 사람과의 접촉이기 때문이다.

[책마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자리는 살아남는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사회학과 교수 앨리슨 J. 퓨의 신간 <사람의 마지막 직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고 있는가?’ 저자의 답은 의외로 직업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즉 연결노동이다.

저자가 말하는 연결노동은 단순한 감정노동과 다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그 이해를 다시 상대에게 비쳐주는 일이다. 교사가 학생의 불안을 알아채고, 의사가 환자의 두려움을 이해하며, 상담사가 내담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퓨는 이를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술이자, AI가 가장 대체하기 어려운 노동이라고 규정한다.

이 책의 강점은 추상적인 미래 담론 대신 구체적인 현장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저자는 100여 명의 연결노동자를 인터뷰하며 자동화가 이미 교육·의료·상담 현장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기록한다.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콘텐츠 플랫폼으로 분해되고, 의사는 환자보다 데이터를 더 오래 들여다보며, 상담사는 정해진 대본에 따라 응답하도록 요구받는다. 기술은 사람을 돕기 위해 도입됐지만, 역설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 시간을 줄이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AI를 무조건 적대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동화가 접근성을 높이고 반복 업무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산업 논리다.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라는 목표 아래 연결노동은 점점 표준화되고 계량화된다. 노동자는 더 많은 데이터를 입력하느라 바빠지고, 정작 사람을 바라볼 시간은 줄어든다. 저자가 ‘탈개인화’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책은 연결노동을 낭만적으로 미화하지도 않는다. 연결은 피로하고, 갈등을 동반하며, 때로 실패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바로 그 불완전함이 인간다움의 증거라고 말한다. 상대를 오해하고, 실수를 수정하고,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과정 자체가 기계적 상호작용과 다른 인간 관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후반부에서는 불편한 전망을 제시한다. 미래에는 부유층이 인간에게서 연결 서비스를 구매하고, 그렇지 못한 다수는 AI 챗봇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연결마저 계층화하는 사회다. 이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문제로 확장된다. 실제로 저자가 인터뷰한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인간이 존엄을 느끼는 순간이 ‘효율적인 서비스’를 받을 때가 아니라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고 느낄 때임을 증언한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