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 투자처는 부족…몸값 치솟아
시장 과열·기업가치 고평가 조짐
K뷰티·원전 등 투자 대상 넓히고
운용 자율성 제고 방안 검토해야
과거 정책펀드 실패 되풀이 안돼
이상열 편집국 부국장
올해 각각 10조원이 배정된 초저금리 대출과 인프라 투·융자는 삼성전자 평택 5라인 AI반도체 클러스터 공사에 2조5000억원, 신안우이 해상풍력 사업에 7500억원 등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3조원 규모의 직접 지분투자도 리벨리온, 업스테이지 등에 대한 증자 참여 방식으로 첫 집행이 이뤄졌다. 7조원 규모의 간접 지분투자 역시 이달 국민참여형 펀드 판매 개시와 기관투자형 펀드 위탁운용사(GP) 1차 선정으로 막이 오른다. 이에 올 하반기 간접 지분투자까지 본격화하면서 펀드 자금 집행이 봇물이 터질 전망이다.
국민성장펀드의 필요성과 명분은 충분하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투자 규모가 크고 회수 기간도 긴 첨단산업 투자를 민간 금융에만 맡길 순 없다. 정부가 일부 위험을 떠안고 부동산에 쏠린 민간 자금을 첨단산업으로 돌린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화학, 철강 등 기존 주력산업 부진과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고전하는 한국 경제에 새 동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정책의 필요성이 곧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집행의 정교함이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효과를 극대화하는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금융권에선 벌써 지분투자 분야를 중심으로 국민성장펀드의 후유증을 걱정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은행·보험권의 생산적 금융과 증권사 모험자본에 이어 국민성장펀드까지 가세해 돈은 넘쳐나지만 우량한 투자 대상은 한정돼 있다는 게 핵심 이유다. 투자 포트폴리오 발굴이 금융권의 난제가 됐다는 것이다.
기술력이 높은 첨단산업 기업엔 자금조달 목표액의 몇 배에 달하는 투자 의향이 몰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투자자가 기업을 고르는 게 아니라 기업이 투자자를 고르는 ‘갑을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투자하려면 얼마의 기업가치에 얼마를 넣을지 일종의 ‘가격 입찰’을 써내라고 금융회사에 요구하는 기업도 나온다고 한다. 한 금융지주 임원은 “1년 전만 해도 5000억원대로 평가받던 기업들이 이제는 기업가치를 2조~3조원대로 인정해줘야 투자를 받겠다고 한다”며 “거품이 끼고 있지만 국민성장펀드 투자 목표도 달성해야 해 난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다른 쪽에선 비효율 투자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얼마 전 한 토종 사모펀드(PEF)는 2차전지 분야 기업으로부터 몇 달간만 단기투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기술력도 평범하고 적자가 지속된 기업이어서 어떻게 상환할지 물었더니 “연말 국민성장펀드 자금을 100% 받는다. 이걸로 갚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PEF 관계자는 “몇 년 뒤 국민성장펀드 수익률이 걱정된다”며 “이 일을 겪은 뒤 우리는 국민성장펀드 GP 신청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투자업계에서는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투자 대상 부족 문제를 해소하려면 투자 분야를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K뷰티와 K푸드, 항공우주, 소형모듈원전(SMR)을 포함한 원전 등이 우선 후보로 거론된다. 신주 투자뿐 아니라 기존 대주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하는 구주 투자도 폭넓게 허용해 운용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5년간 총액은 유지하되 연간 투자액은 시장 과열 여부와 기존 펀드 집행 속도를 봐가며 탄력적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제안도 많다. 비효율 투자를 줄이려면 자금 소진율이 낮더라도 GP들에 신속한 투자 압박을 가하지 않는 원칙 마련 역시 필요하다.
금융위원회 등 관련 부처와 산업은행은 이런 의견을 충분히 듣고 제도의 완성도와 자금 집행의 효율성을 높여나갔으면 한다. 국민성장펀드가 이명박 정부의 녹색·신성장동력펀드, 문재인 정부의 뉴딜펀드처럼 또 하나의 실패한 관제펀드로 남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