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K-거버넌스의 재발견
영미식 거버넌스 논의에는 전제가 하나 있다. 이사회가 독립적이면 기업은 잘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엔론의 이사회는 독립성 기준을 형식적으로 충족하고 있었다. 리먼브라더스 이사회 역시 다수가 외부 이사였다. 이 기업들이 무너진 것은 독립이사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금융을 모르는 은퇴자들이 이사회를 채우고, 감사위원회는 일 년에 일곱 번 회의를 열었으며, CEO 한 사람이 사실상 모든 것을 결정하는 동안 이사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반면 에르메스는 1837년 창업 이래 6세대에 걸쳐 창업 가문이 경영권을 이어오고 있다. 독일의 제약·화학 기업 머크는 1668년 창업 가문이 13대, 350년 넘게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로슈, 베르텔스만도 마찬가지다. 이 기업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독립이사 비율이 높아서가 아니다. 오너십을 유지하면서 장기적 관점으로 경영했고, 그 오너십을 이해관계자의 신뢰와 결합하는 구조를 스스로 설계했다.

학술 연구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와튼스쿨 라피 아밋(Raffi Amit) 교수와 벨렌 비야롱가(Belén Villalonga)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가족이 소유한 기업 가운데서도 창업자가 CEO를 맡거나 이사회 의장으로서 전문경영인을 기용하는 경우에는 비(非)가족기업보다 기업 가치가 높게 나타난다.

한국 상장기업을 분석한 실증연구들 역시 지분과 경영이 일치하는 오너 CEO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수익성 등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인다는 결과를 제시하고 있으며, 외환위기 이후에는 오너의 강한 책임성과 신속한 의사결정이 이러한 성과 차이를 설명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재벌이라는 단어에 담긴 부정적 함의가 이 사실을 가려왔지만, 실증의 세계에서 오너 경영의 강점은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물론 한계도 분명하다. 오너 지분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소수 주주를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폭스바겐 디젤게이트는 강력한 오너십 구조 아래서도 윤리적 거버넌스가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오너십이 그 자체로 좋은 거버넌스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해법은 오너십을 해체하는 것인가. 에르메스와 머크, 로슈가 보여준 답은 다르다. 그들의 공통 원칙은 하나다. 통제를 유지하면서 투명성을 더하는 것. 에르메스는 창업 가문의 의결권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주식합자회사 구조를 택하면서, 동시에 가문 헌법과 이사회 선임 규범을 성문화했다. 머크는 350년 역사 속에서 가족 의회와 가족 위원회를 별도로 운영하며 세대를 잇는 오너십 역량을 제도적으로 육성해왔다. 오너십은 지키되, 그 오너십이 이해관계자의 신뢰와 결합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한국 기업에 이 논의가 왜 지금 중요한가. 상법 개정으로 이사회 독립성 요건이 강화되고 있다. 필요한 방향이다. 그러나 형식적 독립성이 실질적 거버넌스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엔론과 리먼이 이미 증명했다. 한국 기업에 필요한 것은 독립이사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사회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오너의 장기 투자 역량과 이사회의 전략적 감독이 결합되고, 협력사·임직원·지역사회를 포함한 이해관계자 신뢰가 이 구조 위에 쌓일 때 비로소 거버넌스는 기업의 자산이 된다.

영미식 정답을 이식한다고 한국 기업이 강해지지 않는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오너 경영의 강점을 살리되, 그 강점이 지속가능하도록 구조를 재설계하는 것이 K-거버넌스의 본질이다.

<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스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