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빅 마더' 중 한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연극 '빅 마더' 중 한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 속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뉴스를 읽고, 어제 검색했던 상품이 광고로 등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요즘. 편리함을 이유로 우리의 욕망과 선택을 데이터 회사에 맡겨버린건 아닐까. 31일 개막한 서울시극단의 연극 '빅 마더'(Big Mother)는 바로 이러한 공포를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개막 전날, 서울시극단은 프레스콜을 통해 작품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 작품은 프랑스 극작가 멜로디 무레의 '빅 마더'를 각색했다. 정치, 미디어, 빅데이터가 결탁한 현대 사회의 구조를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낸 점이 특징. 거대 권력의 음모를 폭로하려는 뉴욕 탐사지 기자 오웬 그린(유성주·조한철), 케이트 블랙웰(최나라), 알렉스 쿡(이강욱·김세환), 줄리아 로빈슨(신윤지) 4명의 사투를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 대중이 믿고 싶어하는 것이 진실, 조작된 사실이 진실이라는 환경 속에서 기자들은 전통적 저널리즘의 한계를 처절히 경험한다. 이처럼 '빅 마더'는 투명성을 가장한 통제, 개인 정보 수집, 여론 조작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진실이 작동하는 방식을 다뤘다.
연극 '빅 마더' 중 한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연극 '빅 마더' 중 한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60개의 박진감 넘치는 씬, '쇼츠(Shorts)'처럼 흐르는 연극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단연 60개에 육박하는 짧고 강렬한 씬(Scene)들의 연결이다. 이준우 연출은 프레스콜을 마친 뒤 "미디어 환경과 데이터 시대의 알고리즘을 다루는 희곡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 속도감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무대는 마치 거대한 방송 스튜디오를 연상케 한다. 전면이 투명한 유리와 스크린으로 구성된 무대에서 배우들은 쉴새 없이 움직이며 영화같은 장면을 만들어 낸다. 90년대 미국에서 제작된 수사물같은 스크린 영상은 보는 재미를 더한다.
연극 '빅 마더' 중 한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연극 '빅 마더' 중 한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극 속 기자들이 취재하는 대상이나 미디어에 비쳐지는 인물들은 라이브 캠을 통해 무대 위 스크린으로 송출되기도 한다. 관객은 배우의 실제 연기와 스크린에 비치는 편집된 영상을 동시에 목격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영상 콘텐츠들이 어떤 의도와 과정을 통해 가공되는지 이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연출법이기도 하다.

'빅브라더'의 강압보다 무서운 '빅마더'의 유혹

과거 조지 오웰이 소설에서 그린 '빅브라더'가 공포를 통한 통제였다면 이 작품 속 '빅 마더'는 따뜻한 알고리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준우 연출은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소망하는 것조차 알고리즘이 이끄는 세상이 된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고 했다. 진실을 좇아 취재하는 기자들을 무력화하는 건, 감정에 호소하는 인물들이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희석되고 각자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 편향의 사회를 꼬집는 듯 보인다. "상품 추천을 넘어 정치적 성향까지 조종당할 수 있다는 현실이 작품에 참여하면서 더욱 와닿았다"는 배우 조한철(오웬 그린 역)의 고백은 작품의 메시지가 픽션이 아니라는 걸 방증한다.

배우들의 사투와 실험적인 무대 미학

60개의 장면을 소화해야 하는 배우들에게 이번 무대는 거대한 도전이었다. 사방이 유리로 된 무대는 배우들이 어떤 순간에도 숨거나 기댈 곳이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 배우 최나라는 "오늘 아침까지도 연기자들끼리 사투를 벌였다"며 치열했던 연습 과정을 전했다. 한편 이번 공연은 더블 캐스팅의 조합에 따라 네 가지의 각기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만큼, 다회차 관람의 묘미도 갖췄다.
연극 '빅 마더' 중 한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연극 '빅 마더' 중 한 장면. 서울시극단 제공
현실 정치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풍자와 미디어의 속성을 꿰뚫는 연출은 극의 몰입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준우 연출은 "기자가 죽어도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신념, 진실을 바탕으로 기사를 쓴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작업했다"고 말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고 정의를 위해 나아가는 4명의 기자들의 시도가 끝날 때엔 헛헛한 여운이 감돈다. '빅 마더'의 정체가 밝혀지려는 순간 이들은 행방불명이 돼 버린다. 여기에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위협은 거짓말하는 개인이 아니라 설계된 거짓말을 하는 데이터라는 사실이 씁쓸함을 더 하는 작품. 공연은 4월 25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열린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