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미술가 맨디 엘-사예(Mandy El-Sayegh)를 만났다. 그녀의 신작은 31살에 미국에서 요절한 한국 미술가 차학경에서 영감을 받았기에 더욱 흥미롭다.
미술가의 가정환경은 작품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런던에서 활동하는 멘디 엘-사예는 가족 내력부터 특별하다. 어머니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고, 아버지는 팔레스타인계이다. 어머니는 조산사였고, 라텍스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건강이 안 좋아서 항상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했으며, 서예를 하고 무술을 연마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 중국어와 아랍어도 구사했지만, 영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거의 잊었다고 한다.
맨디 엘-사예 / 사진. ⓒ스페이스K
그녀의 대표작인 그물 같은 네트 그리드(Net-Grid) 패턴은 어머니가 사용하던 거즈에서 유래했고, 핏빛 라텍스 바닥은 중국의 부(富)와 팔레스타인의 죽음을 은유한다. 하지만 정작 집에서 부모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번 전시 제목은 <테레사, 이후(For Theresa)>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살해당한 비운의 한국 미술가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1951-1982년)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맨디는 파편을 수집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것이 자신과 차학경과 공통점이라고 했다. 차학경이 흩어진 언어의 파편을 모아 역사 속에 가려진 목소리를 기록했듯이, 맨디 엘-사예는 수집한 자료를 겹쳐 봉합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지 않은 개인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신작 <세계의 명화(Grand Collection of World Art)> 연작은 맨디가 한국의 고서점에서 발견한 <세계의 명화> 책 표지에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양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이미지를 포착해, 이를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옮긴 작품이다. 관찰의 시점에서 여성을 그렸던 프랑스 신고전주의 회화가 한국에 온 경로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서구 그림과 한글의 파편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1985년생의 젊은 작가답지 않은 진중한 전시라서 미술 애호가라면 주목할 만하다. 전시는 서울 마곡 스페이스K에서 6월 21일까지 만날 수 있다. 다음은 작가와의 대화다.
세계의 명화 (정본), 2026, Oil and acrylic on canvas with collaged and silkscreened elements, 212 x 164 x 45 cm / 사진. ⓒ스페이스K ▷회화, 설치, 사운드, 퍼포먼스 등 폭넓은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작업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나는 스스로를 '콜라주하는 사람(Collagist)'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다양한 지역과 다채로운 영역을 오가며 소통한다. 역사적, 사회적 부분을 개인적으로 실험한다는 것은 미술가 차학경의 방식과 공통적이다. 파편을 재조합하고 다시 분리하는 방법은 우리 인체의 신비와 비슷하다."
▷전시 제목 <테레사, 이후>는 무슨 의미인가? "차학경 작가는 나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 그녀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다. 차학경은 파편을 모아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미술가이며, 그녀의 책 <딕테>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녀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 나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이 전시는 테레사에서 바치는 러브 레터와 같은 것. 계속 고쳐가는 작업 과정이 닮았고, 때로는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행운을 가져다준다."
▷6년 전 필리핀 큐레이터의 추천으로 차학경에 대해 알게 됐다고 들었다. 보다 상세히 설명해달라.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멀티 링구얼(multilingual)' 작가라는 공통점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차학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도 가정환경으로 인해 여러 나라의 언어를 배웠고, 작품에도 이를 녹여왔다. 이주민으로 살아본 사람은 그런 마음을 잘 알 것이다. 서툰 언어를 쓴다는 결함은, 단순히 말을 넘어 주체성으로까지 확장된다. 차학경은 그런 공백을 용기 있게 받아들였다. 이번 서울 전시 때문에 차학경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간 계속 그녀에 대해 탐구해왔다. 내 전시로 인해 그녀가 한국에서 더 알려지기를 희망한다. 차학경은 일반적 구조를 깨버리려고 했던 작가였기에, 그녀의 작품 세계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나도 관람객의 기대와는 다른 작품을 하려고 노력한다."
넷-그리드 (아틀라스), 2026, Oil and acrylic on linen with collaged and silkscreened elements, 235 x 225 x 45 cm / 사진. ⓒ스페이스K▷이곳 스페이스K 미술관에서 받은 영향은 무엇인가? "그간 내가 전시했던 곳 중에서 가장 큰 전시장이라 처음 와서 보고 압도당했다. 미술가와 큐레이터들이 원하는 바로 그런 공간이다. 이곳에 내 작은 파편들을 어떻게 담을지 리서치하며 고민했다. 특히 이곳은 층고가 9m로 높기 때문에 어떻게 작품 방식을 재생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했다. 한국이라는 지역과 시대를 고려한 고민이었다."
▷전시장에 당신의 서재를 재현한 아카이브도 있어서 흥미로웠다. 조선 시대의 책가도를 떠오르게 한다. 주로 어떤 주제로 수집하는지?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다 수집한다. 무의식적인 행위이지 의도를 가진 컬렉션은 아니다. 기억과 관련이 있거나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아마 그 대상인 것 같다. 주로 지도책, 예술 서적, 정신분석학, 의학 서적들로 채워져 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머리카락도 모은다(웃음). 전시를 앞두고 그 나라의 시장에 가보곤 하는데, 이번에는 한국 고서점에서 <세계의 명화> 책 시리즈를 발견해서 재미있었다. 직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의식적으로 탐구해서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생각해본다.
벽에는 신문과 같은 원천 자료를 활용했다. 회화는 인터넷에서 찾은 한국 호랑이와 무속신앙 자료에서 영감을 받았다. 외국인이 인터넷에서 한국에 관한 자료를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내 그림에는 한국의 식민지 시대의 선전 자료도 있고, 아버지의 나라 팔레스타인의 지도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자료를 패치워크처럼 결합하고 네트 그리드를 만들었다. 회화는 현상과 표면으로 이루어진다. 관람객의 시선에 따라 어떤 것이 그림에서 돋보이는지 달라진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그림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많은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테레사, 이후(For Theresa)> 전시 전경 / 사진. ⓒ스페이스K▷부모의 고향으로 인한 특별한 정치적 성향이 있는지 궁금하다. 당신이 특히 한국의 식민지 시대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흥미롭다. "어떻게 보면 덫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모두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신문이나 광고도 봐도 그 어떤 것도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SNS도 그렇다. 작품에 대한 해석도 보는 이마다 달라지지만, 나는 주체적이다. 미학적 요소를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 우선으로 한다."
▷전시장을 하나의 거대한 피부처럼 만든 빨간색 바닥이 인상적이다. 빨간색의 의미는 무엇인가? "빨간 라텍스 바닥은 2023년 두바이 전시에서 첫선을 보였다. 빨간색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중국에서는 부와 연결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끔찍한 일들을 연상하기도 한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권리가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애도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2023년 당시에는 문자를 작품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욱 중요했다. 바닥에는 신문을 깔았고, 고무 농장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기억에서 착안해 이를 라텍스로 코팅한 것이다. 수축하고 변색하는 라텍스의 특징은 신체의 연약함을 상기시킨다."
<테레사, 이후(For Theresa)> 전시 전경 / 사진. ⓒ스페이스K▷전시를 보면 당신이 부모의 고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 부모에게 어떤 특별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어떤 것도 들은 적이 없다. 우리 집에는 두 개의 또 다른 영토가 존재했지만, 빈 공간과 같았다. 그것이 나의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시퀀스 사이의 빈 공간이야말로 예술가가 태어나는 곳이다. 부모 모두와 완전한 교감을 하지 못했고, 언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차학경과 나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동병상련을 느낀다. 이렇게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내가 예술가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힘들었던 마음을 이야기하자니 감정이 북받친다."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말해달라. "의도하는 시퀀스는 없다. 내러티브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를 통해 작업의 여러 단계를 보여주는 것을 즐긴다. 예를 들어 이번 전시의 서재 설치를 통해서 수집에 대한 내 열정을 관람객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맥락에서 전시를 보여주고 싶고, 차학경에 대한 반영도 나만의 방식 중 하나다. 전시 앞부분을 놓쳤다면, 다른 부분에 집중할 수도 있다. 정해진 시퀀스가 없기에 자신만의 해석으로 편하게 전시를 보면 된다. 많은 이들이 전시장에 오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여러 소재를 수집한 것처럼, 관람객도 자유롭게 자신만의 연결고리를 찾기를 바란다. 디스플레이에 관심을 가져도 좋다. 마음에 들어오는 것에 공감하면서 연결 짓는 것은 차학경의 방식이기도 하다. <딕테>도 시퀀스가 없다. 어떤 페이지를 먼저 읽어도 연결이 된다.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내 전시를 즐겁게 감상해 줄 것을 기대한다."
화이트 그라운드 (배신당한), 2023, Acrylic on canvas with collaged studio debris, 235 x 225 x 45 cm / 사진. ⓒ스페이스K
이소영 프리랜서 미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