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관련 기사를 살피다 보면 ‘한국 재즈 1세대’라는 표현을 이따금 접하게 된다. 이름이 거론되는 인물들은 대개 1930~40년대에 태어나 1950~60년대에 활동을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그런 기사대로만 하자면, 그들이 아직 음악 활동에 나서지 않았던 1940년대 이전에는 한국에 재즈의 역사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1세대들이 태어나기 전인 1920년대에도 재즈를 표방하고 지향하는 음악은 이 땅에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재즈의 실질적 의미가 어떠했는지, 그 연주자의 기량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해석과 평가가 다양하게 나올 수 있겠으나, 세대를 거론하며 1940년대 이전 재즈 역사를 아예 외면하는 것은 아무래도 온당치 않다. 1920~30년대 조선의 재즈를 재즈로 보지 않는다면, 재즈 발상지인 미국에서 같은 시기에 연주되었던 음악 또한 제대로 된 재즈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 재즈’ 이전에 존재했던 ‘조선 재즈’, 그 여명기의 모습은 100년 전인 1926년부터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당시엔 소리 기록 매체인 음반이 아직 대중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나마 익숙한 전통음악이 주요 녹음 대상이었고, 생경한 음악이었던 재즈는 상품성을 인정받아 음반에 담기기까지 몇 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초창기 조선 재즈는 무대로 시작해 방송과 음반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거쳤는데, 1920년대 후반에 진행되었던 그 과정은 대략 다섯 단계로 나누어 더듬어 볼 수 있다.
덴카쓰이치자 재즈밴드의 모습(<조선신문> 1926년 5월 23일자) / 제공. 이준희
덴카쓰이치자 재즈밴드의 모습(<조선신문> 1926년 5월 23일자) / 제공. 이준희
특정 곡이 아닌 공연 프로그램에 재즈를 분명히 내세운 기록이 처음 확인되는 때는 1926년 5월이다. 5월 13일부터 약 한 달 동안 서울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에 참여한 일본 공연단 덴카쓰이치자(天勝一座)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단장이자 유명 여성 마술사인 쇼쿄쿠사이 덴카쓰(松旭齋天勝)는 자신의 특기인 마술을 비롯해 다양한 음악과 춤, 촌극과 가극으로 구성한 버라이어티 쇼를 선보였고, 그중 일부가 재즈밴드의 연주였다. 앞서 1924년 1월부터 한 해 남짓 미국 순회공연을 진행했던 덴카쓰이치자에서 최신 음악 역량 확충을 위해 단원으로 채용한 8인조 미국 재즈밴드가 조선까지 함께 와서 공연에 참여했던 것이다.
1926년 5월 덴카쓰이치자 공연 광고.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재즈음악이 표기되어 있다(차례대로 <경성일보> 1926년 5월 16일자와 17일자). / 제공. 이준희
1926년 5월 덴카쓰이치자 공연 광고.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재즈음악이 표기되어 있다(차례대로 <경성일보> 1926년 5월 16일자와 17일자). / 제공. 이준희
덴카쓰이치자 밴드가 연주했던 곡목은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하와이 민속음악과 오리엔탈 무드가 짙은 곡들이 포함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아마 밴드 멤버 중 다수가 하와이 출신이었기 때문일 텐데, 그러한 곡들이 당시 조선인 관객에게 즉각적으로 호응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안 그래도 낯선 음악을 일본 공연단이 일본인 관객 중심으로 구성한 쇼로 접한 데에다, 공연 시기가 하필이면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난 순종(純宗)의 국장 기간과 겹쳐 사회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다를 건너온 ‘박래품(舶來品)’ 같았던 첫 재즈 공연은 그렇게 잠시의 흔적만 남기고 말았지만, 1927년부터는 좀 더 분명한 조선 재즈의 두 번째 단계가 방송을 통해 전개된다. 1927년 2월 16일에 개국한 경성방송국 라디오에 여러 재즈밴드가 출연, 청취자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1927년 2월부터 1930년 연말까지 선샤인재즈밴드(일명 선샤인노벨티재즈밴드), 경성재즈밴드, 오리엔탈오케스트라, CM관현단, SM재즈밴드 등의 방송 기록이 확인되며, 그중 가장 먼저 등장해 출연도 가장 많았던 선샤인재즈밴드는 경성방송국 개국 이틀 뒤에 <수에즈(Suez)>, <오전 3시(Three O'Clock in the Morning)> 등 미국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샤인재즈밴드를 비롯한 여러 악단이 조선에서 조직되고 활동했던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그 멤버 중 조선인 음악가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남은 기록으로만 추정하자면 조선 거주 일본인들의 밴드였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다. 또 방송 활동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반면 공연 기록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것도, 선샤인재즈밴드 등을 조선 재즈의 의미 있는 주체로 평가하는 데에 다소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조선 재즈의 세 번째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장을 연 주역으로는 아무래도 조선인만으로 조직된 코리안재즈밴드를 들 수밖에 없다.
1928년 3월 무렵 결성된 코리안재즈밴드의 모습(<조선일보> 1928년 4월 7일자) / 제공. 이준희
1928년 3월 무렵 결성된 코리안재즈밴드의 모습(<조선일보> 1928년 4월 7일자) / 제공. 이준희
1928년 3월쯤 발족한 것으로 짐작되는 코리안재즈밴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당시 장안 최고의 한량으로 유명했던 백명곤(白命坤)이다. 집안 재산이 넉넉했던 덕에 스포츠와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던 그는, 1928년 1월 축구 경기를 위해 중국 상하이를 다녀오면서 여러 악기를 구입했고, 주변 음악 동지들을 규합해 코리안재즈밴드를 결성했다. 시기에 따라 구성원 변동이 다소 있기는 했지만, 백명곤 외에 조선 양악의 태두 홍난파(洪蘭坡)와 1932년 이후 오케(Okeh)레코드를 운영하게 되는 이철(李哲) 등이 9인조 코리안재즈밴드 멤버 중 특히 기억할 만한 이들이다.

1928년 4월 첫 공연을 가진 코리안재즈밴드는 곧이어 5월에 경성방송국에도 출연함으로써 같은 시기 다른 밴드들과 달리 무대와 방송을 아우르는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주로 미국 곡을 연주하는 데에 그쳤던 다른 밴드들과 달리 <아리랑>, <방아타령> 같은 조선 민요를 홍난파의 편곡으로 연주하는 적극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재즈에 대한 조선인의 관심과 긍정적 인식이 조금씩 확산하는 데에 코리안재즈밴드의 기여가 적지 않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28년 5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코리안재즈밴드의 모습 / 출처. '나운영의 생애와 작품' 홈페이지
1928년 5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코리안재즈밴드의 모습 / 출처. '나운영의 생애와 작품' 홈페이지
그런데 무대와 방송을 넘나들며 활동했던 코리안재즈밴드는 1932년 봄 마지막 방송 출연 때까지도 음반 녹음은 뜻밖에 하지 않았다. 첫 공연과 방송에서 연주했던 대표 레퍼토리 <아라비아 노래를 불러 다오(Sing Me a Song of Araby)> 같은 곡이 1930년 5월에 음반으로 발매되긴 했지만, 코리안재즈밴드의 연주는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코리안재즈밴드가 조성한 재즈 인기를 타고 1928년 9월에 등장한 첫 번째 재즈 음반 광고는 조선 재즈가 네 번째 단계로 나아간 하나의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미국 재즈밴드의 패왕(霸王)’ 폴 화이트맨(Paul Whiteman)의 음반을 소개한 광고는 사실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미국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 제작 음반을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독자 번호체계로 재발매한, 말하자면 일본 양악 음반임에도 조선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조선어 광고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는 그러한 광고의 등장 배경에는 1928년 당시 조선의 재즈 붐, 그리고 그 시장성에 대한 음반회사의 기대와 계산이 있었다.
1928년 9월 신문에 실린 첫 번째 재즈 음반 광고와 세부내용(<동아일보> 1928년 9월 4일자) / 제공. 이준희
1928년 9월 신문에 실린 첫 번째 재즈 음반 광고와 세부내용(<동아일보> 1928년 9월 4일자) / 제공. 이준희
그러나 콜럼비아레코드의 기대와 달리 광고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음반 판매 성적이 좋았다면 후속 광고가 또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미국 재즈 음반의 조선어 광고는 이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조선인이 편곡하고 연주한 조선 재즈에는 나름 호응했던 대중이 본고장 미국의 재즈 음반에는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국 재즈처럼 세련되지 않더라도, 오히려 듣기 민망할 만큼 서툴더라도, 많은 조선인이 궁금했던 것은 결국 조선인의 재즈였는지도 모른다.

조선인의 목소리가 담긴 첫 번째 재즈송 음반이 1929년 11월 도쿄에서 녹음되어 1930년 1월 말에 발매된 일은, 그래서 조선 재즈의 여명기를 마무리하는 다섯 번째 단계로서 의미가 있다. 가수 아닌 영화배우 복혜숙(卜惠淑)이 일본 악단 반주에 맞춰 노래한 네 곡은 두 달 간격으로 두 곡씩 발매되었는데, 연주와 가창 모두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잘 못해서’ 충격적이다. 하지만 음정, 박자 모두가 불안했던 복혜숙의 음반이 있고 나서 1930년대 조선 재즈의 성장이 있었음도 틀림없는 사실이긴 하다.
1930년 1월 말에 발매된 재즈송 <종로 행진곡>, <그대 그립다> 광고(<조선일보> 1930년 1월 31일자) / 제공. 이준희
1930년 1월 말에 발매된 재즈송 <종로 행진곡>, <그대 그립다> 광고(<조선일보> 1930년 1월 31일자) / 제공. 이준희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을 배울 때처럼, 조선이 처음 재즈를 접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말 그대로 초보적이고 미숙했다. 그래도, 찾고자 한다면 그런 모습에서 또한 어떤 아름다움을 충분히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 아장아장, 불안불안한 중에도 고졸(古拙)의 미는 깃들어 있는 법이다.

이준희 대중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