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저튼> 최초 아시아계 주연, 한국계 하예린 배우
신데렐라 이야기지만 왕자의 내적 고뇌 약해
입체적 갈등 부족으로 심심한 전개 아쉬워
19세기 초 영국. 브리저튼 가문의 문제아인 베네딕트는 남녀 가리지 않고 파트너를 갈아치우며 방탕하게 지낸다. 결혼에만 몰두한 귀족 여성들은 그에게 영 시시하기만 하다. 그러던 그가 억지로 가면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미스터리한 여성에게 홀딱 반해버린다. 샹들리에의 아름다움에 홀로 매혹돼 웃고 있던, ‘은빛 드레스의 순수한 아가씨’에게 말이다.
넷플릭스의 인기 로맨스 드라마 <브리저튼>. 최근 공개된 네 번째 시즌의 시작은 이전 시즌보다 더 달달하고 동화적이다. 베네딕트가 한눈에 반해버린 상대의 정체는 바로 하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무도회에 참석한 소피(하예린)다. 그녀 또한 베네딕트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다.
계급의 차이뿐 아니라 인종의 차이까지 소피에게 부여한 것이다. 익숙한 사랑 이야기 위에 ‘경계’라는 극적 요소를 덧입히는 것, 이는 <브리저튼>이 특히 잘해온 방식이다. 흑인 귀족과 혼혈 여왕이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독특한 세계관은 (‘퓨전 사극’에 익숙한 K-드라마 팬들에겐 별것 아닐 수 있겠지만) 드라마가 처음 공개된 2020년엔 신선한 충격이었다.
예컨대 시즌 2에서 인도계 이민 가족 출신인 케이트는 외부인에 대한 상류사회의 날선 시선을 극복해야 했다. 시즌 3의 페넬로페는 날씬하지 않은 외형으로 받았던 상처를 힘겹게 이겨내고 사랑에 다다른다. 연인들이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험준할수록, 시청자들은 가슴 졸이며 이들을 응원하게 되는 법이다.
소피에게도 험난한 앞날이 펼쳐진다. 무도회에 몰래 참석했던 걸 고용주에게 들키고, 보금자리였던 저택에서 쫓겨난다. 억울할 만도 하지만, 소피는 자신의 계급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시골 저택에서 또다시 하녀 일을 시작한 소피는 베네딕트와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일부러 가시밭길을 가는 소피의 모습은 애틋하다. 그러던 소피가 베네딕트의 따뜻한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순간, 극의 긴장은 살짝 떨어진다. 이 와중에 레이디 브리저튼의 비밀 연애, 딸 프란체스카의 불안한 결혼 생활, 여왕 샬럿과 그 절친 레이디 댄버리의 갈등까지 끼어든다. 소피와 베네딕트의 사랑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다소 산만한 전개가 이어진다.
연인의 내면은 더 격하게 흔들려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베네딕트다. 상류층 최고의 인기남인 그에겐 ‘열린 마음’까지 있다. 하녀를 차별하지 않으며, 때로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추잡한 귀족들에게 몸을 날리는 남자다. 그런 그가 사랑으로 돌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이유는, 하녀인 소피를 배려하기 때문(!)이다. 즉, 적어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계급 갈등이 큰 문제가 아니다. 인종적 차이는? 이 역시 베네딕트에겐 고민거리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전 시즌들에 비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예전 커플들은 어땠을까. 시즌 2의 앤서니는 장남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사랑 없는 결혼’을 받아들이려고 했고, 케이트 또한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사랑을 억눌러야 했다. 시즌 3의 콜린과 페넬로페는 오랜 우정을 버리고 사랑을 택할 것인지 번민했고, 이같은 딜레마는 오늘날의 시청자에게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에 비해 베네딕트의 내적 갈등은 다소 약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아들딸의 상대가 진실한 사람이기만 하다면 웬만한 경계쯤은 뛰어넘을 각오가 있는 인물이다. 브리저튼 가족이 소피를 이처럼 일찍 받아들이면서, 주인공들이 싸워 이겨야 하는 상대는 몇 명의 빌런으로 좁혀진다.
마무리는 늘 그렇듯 흐뭇한 해피엔딩이다. 소피의 계모이기도 했던 아라민타와의 대결은 나름대로 통쾌하게 수습된다. 연인의 마지막 운명은 런던 사교계를 쥐락펴락하는 큰손, 샬럿 여왕에게 달려 있다. 이전 시즌에서 사교계의 숨겨진 칼럼니스트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를 까발리겠다며 연인의 심장을 겹겹이 옥죄었던 그녀다. 이번 시즌에서도 샬럿 여왕은 중요한 활약을 보여주지만 그 존재감이 다소 약해 아쉽다.
다음 시즌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팬들에 따르면, 브리저튼가의 딸인 프란체스카 또는 엘로이즈가 유력하다. 이번 시즌에서 프란체스카와 미묘한 관계 변화를 보여줬던 미카엘라(프란체스카 남편 존의 사촌으로, 원작 소설과 달리 드라마에선 여성이다)가 프란체스카와 또 다른 파격 로맨스를 보여줄까.
아니면 여성 해방을 외치며 사교계에 코웃음 쳤던 엘로이즈가 뭔가 다른 모습을 보일까. 이번 시즌에서 다소 산만하게 제시됐던 조연들의 이야기가 다음 시즌에서 빛을 발할지 지켜볼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