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는 ‘작은 배우’는 있어도 ‘작은 역할’은 없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이 문구는 배우와 연기에 대한 명언이기도 하지만, 좋은 작품에 대한 명언이기도 하다. 유독 한두 캐릭터가 아닌 다수의 인물들이 태피스트리(tapestry)처럼 장관을 빚어내는 작품들이 있다. 강윤성 감독의 <범죄도시>가 그랬고, 시리즈 <카지노>와 <파인>이 그랬다. 물론 이 명작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역할이 존재했다면 그는 바로 홍기준 배우일 것이다.

아마도 관객들은 그를 비교적 근작, 즉 위에 언급한 작품들로 기억하겠지만 사실 그는 20여 년이 넘는 커리어와 작품 필모그래피를 가진 ‘중견 배우’다. 여기서 ‘중견’이란 그의 나이가 아닌 그가 거쳐 간 크고 굵직한 작품들을 함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인터뷰는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가 거의 처음으로 연기를 시작했던 시점에서부터 만난 거의 모든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첫 인터뷰이기 때문이다.
홍기준 배우 / 사진=김범준 기자
홍기준 배우 / 사진=김범준 기자

▷ 데뷔작이 이해영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2006)로 기록된다. 커리어의 시작부터 비교적 큰 작품을 맡았다.

"그렇다. 사실 캐스팅 비화가 흥미롭다. 오디션을 세 번이나 보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목소리’ 때문에 캐스팅되었다. 당시 영화의 조감독님이 내 목소리를 좋아해 주었고, 역할(경찰)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인생 최초의 상업 영화였는데, 비록 한 회차였던 촬영이지만 지금까지 모든 기억이 생생하다. 동국대학교 안에 있는 한 빌딩에서 오디션을 봤던 기억,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경찰서 장면을 찍은 기억까지 말이다. 현장이 무척 즐거웠다."

▷ 이후로 계속 영화 작업을 이어서 했나?

"<천하장사 마돈나> 이후로는 줄곧 대학로에서 공연을 했다. 사실 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해서 공연을 하는 수순이 당연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낙원의 길목에서>, <밑바닥에서> 등의 작품을 했고, 사실 공연은 2020년도까지 꾸준히 했으니 꽤 오래 해오고 있는 것 같다. 올해도 2인극을 연출해서 해보자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 홍기준 배우의 공연 프로필은 따로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아서 몰랐던 부분이다. 공연 커리어가 이토록 길었던 것은 매우 흥미롭다.

"공연을 하다가 <상어>(김동현, 2007)라는 독립 영화를 찍게 되었다. 사실 큰 영화는 아니지만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작으로,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 영화의 오늘’ 부문에 초청되었던 영화다. 이 작품에서 만난 구성환 배우가 당시 영화에 입문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정보를 주었다. 프로필을 어떻게 돌리면 되고, 어디로 가면 되는지 등의 유용한 정보들 말이다 (웃음). 그렇게 찍은 작품이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이다. 이후로 영화 작업을 많이 했지만 공연도 거의 일 년에 한 번씩은 무대에 올렸다."
홍기준 배우 / 사진=김범준 기자
홍기준 배우 / 사진=김범준 기자
▷ 홍기준 배우의 프로필, 혹은 약력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아마도 러시아에서 수년간 연기를 공부했다는 점일 것이다. 러시아로 떠나겠다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원래는 동국대학교를 목표로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어머니가 다니시던 절의 커뮤니티(웃음)를 통해 동국대학교의 한 선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이 다녔던 학교가 러시아의 쉐프킨 대학이다. 그 선배가 한국의 연극영화과와 러시아 대학의 커리큘럼, 학비 등을 상세하게 비교해서 준비해 오셨더라. 결국엔 설득당했고 열아홉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러시아로 떠났다."

▷ 연기에 대한 접근이 러시아는 어떻게 다르던가.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 것이지만 본질은 같은 것 같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 학교의 수업 시간이 훨씬 더 길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이곳저곳의 연극영화과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느낀 것은 한국의 연기 수업이 다소 짧다는 것이다. 특히 연기술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연기의 무드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 시간을 너무 조금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모스크바라는 도시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7년 정도의 삶을 살았지 않나. 그곳에서 얻은 것들이 있을까.

"모스크바는 정말로 예술적인 도시다. 특히 공연 극장이 엄청나게 많은 도시다. 학생들은 무조건 100% 무료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예컨대 볼쇼이 발레단의 값비싼 공연까지도 말이다. 공연이 워낙 많다 보니 배우도 많고 노배우 역시 많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한국 같은 경우는 노인 역할을 젊은 배우가 분장해서 하지 않나. 모스크바에서는 거의 그런 경우가 없다. 나이에 맞는 배우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 살면서 공연 예술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고 그 부분은 지금도 매우 그립다."
홍기준 배우 / 사진=김범준 기자
홍기준 배우 / 사진=김범준 기자
▷ 분명 러시아 학교에서 얻은 교육과 모스크바라는 도시에서 체득한 경험들을 한국에서 연기를 가르칠 때도 반영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최근까지도 꽤 오랜 시간 제자들을 배출해 오지 않았나.

"물론 생계로 시작한 것도 있지만 연기를 가르치는 것이 꽤 보람된 일이다. 처음에는 내가 그런 자격이 있을까 반문하기도 했지만,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는 있겠다 싶더라. 곧 열리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는 작품 <내 이름은>(정지영)에서 주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최준우라는 배우는 내가 일곱 살 때부터 가르쳤던 학생이다. 지금은 스물한 살이니까 10년 이상 가르친 셈이다."

▷ 14년 동안 가르쳤다면 거의 ‘소림사’ 수준 아닌가. 최준우 배우에게 뭔가 다른 재능을 발견한 것 같다.

"분명히 그랬다. 준우는 일곱 살 때부터도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10년 넘게 자진해서 레슨비도 동결해서 받겠다고 하고 준우만큼은 끝까지 가르쳤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주연인 최수인 배우가 준우의 누나인데 그 친구도 함께 가르쳤다. 남매가 정말 뛰어나다."

▷ 이쯤 되면 오늘 인터뷰의 주제를 ‘독립 영화의 주역을 키워 낸 홍기준 배우’ 정도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웃음).

"절대 아니다. 뛰어난 어린 배우들을 만난 것뿐이고, 그들이 마땅한 성과를 일궈낸 것뿐이다."

▷ 홍기준 배우에게도 재능을 알아봐 준 그런 소중한 존재가 있지 않나. 바로 강윤성 감독이다. 이젠 명실공히 강윤성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감독의 전작에 출연했다.

"또 다른 페르소나, 임형준 배우도 있다 (웃음).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감독님과는 <범죄도시>(2017)의 오디션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사실 오디션 자체는 매우 힘들었다. 거의 다섯 번이 넘는 오디션을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감독님은 본인의 무명 시절이 길었던 것처럼, 무명이 길지만 재능이 있는 배우들을 발굴하고, 어쩌면 그 사람의 이름보다 더 주요한 역할을 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감독님만의 대단한 열정이자 집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범죄도시>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범죄도시>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 강윤성 감독의 애정을 독점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절대 그렇지 않다 (웃음). 다만 감독님이 만약 좋게 평가를 해주셨다면 감독님의 현장을 내가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감독님 작품의 작업은 대본만큼이나 현장의 공기가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쓰인 것만큼이나 그날 현장의 분위기와 에너지가 들어갈 자리가 꽤 많다는 의미이다. 강 감독님은 그러한 즉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처음 들어가는 배우들은 뭔가 그 분위기에 어울리기가 쉽지 않겠지만, 한번 무드를 타게 되면 그렇게 신나고 창조적인 무대가 없다. 그런 분위기를 나든, 임형준 배우든 잘 만들어서 편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닐지."

▷ 개인적으로 <카지노>의 상구 역은 전형적일 수도 있지만 홍기준 배우가 새로운 작법으로 다시 쓴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강하고 위협적인 악인의 오른팔 정도로만 비춰질 수 있는 캐릭터지만, 무자비하면서도 유연하게, 때로는 간악하면서도 의리를 갖춘 인물로 등장하지 않나. 그런 복합성이 <파인>의 황 선장에서도 비춰진다. 훨씬 더 진화한 형태로 말이다. 대본에 쓰인 것보다 결(texture)과 층이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상 배우의 몫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가슴에 담고 있던 사건이 있었다. 집에 문제가 생겨서 은행 사람들과 시비를 가려야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사실상 나와도 오랜 시간 잘 알고 지내던 직원들이었고 그때의 문제도 다른 쪽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결국엔 잘 해결되었지만, 그때 너무나도 위협적이면서도 친절함을 잃지 않는 섬뜩함을 봤던 것 같다. 권력과 절차에 의해 사람들이 돌변할 수 있는 상황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이중성과 양가성을 내가 맡은 캐릭터에 넣고 싶었다. 상구와 황 선장은 그렇게 일상적인 상황에서 마주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탄생한 인물들이다."
카지노2 '이상구' 역의 홍기준 배우 / 사진 출처.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 유튜브 캡처
카지노2 '이상구' 역의 홍기준 배우 / 사진 출처.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 유튜브 캡처
▷ 현재 하고 있는 작품들도 궁금하다. 정말 오랜만에 주연을 맡지 않았나. <늘봄가든>을 연출한 구태진 감독의 <영덕>이라는 호러 영화다. 촬영이 거의 끝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역할인가.

"이번에도 형사 캐릭터이지만 아무래도 공포 장르이다 보니 많은 면에서 연기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해주신 대로 뭔가 직관적이고 1차원적인 연기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이번 작품과 역할에서 많은 도전을 했다. 공포를 표현하거나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원시적인 접근이 이번 작품에는 필요했다."

▷ 작품이 이제 너무 많아져서 연기를 가르칠 일은 한동안 없을 것 같다. 홍기준 배우의 연기 스쿨에서 배출한 배우들이 많아서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다.

"(웃음) 그 점은 아쉽지만 지금은 정말 너무 행복한 시기다. <영덕>도 그렇고 매 작품에 영혼을 바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정성껏 만들어 낸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는 일이 가장 즐겁다."


같은 직업도 아니지만 홍기준 배우와 인터뷰를 하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일을 꿈꿔보지 않았던 그 여정과, 누군가는 재능을 알아봐 주고 그에 마땅한 역할을 부여해 준 것, 그리고 현재가 그렇게 행복하다는 인물의 삶이 누구든 부럽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그의 직업이 배우라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의 행복에 동참하고 싶다. 그의 백 퍼센트를 넣어 만들었다는 작품으로, 그리고 앞으로 그가 시도해 볼 다양한 프로젝트로 말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