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은 마을, 예술가의 작업실에 경찰이 들이닥치다
에곤 실레, <노이렝바흐 화가의 방>, 1911년 . 그가 체포될 당시에 작업실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 그림출처. 빈 미술관
에곤 실레, <노이렝바흐 화가의 방>, 1911년 . 그가 체포될 당시에 작업실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 그림출처. 빈 미술관
1912년, 오스트리아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노이렝바흐(Neulengbach)에서 낯선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스물한 살의 청년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와 아직 스무 살도 넘기지 않은 그의 연인 발부가 발리 노이질(Walburga Wally Neuzil, 1894~1917, 이하 발리)이 거주하던 빌라로 경찰관들이 들이닥친 건데요, 한 해군 장교의 어린 딸이 어느 날 제멋대로 실레의 집으로 사랑의 도피를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격분한 아버지는 실레가 딸에게 이상한 짓을 했다며 그를 미성년자 의제강간 혐의로 신고해버렸습니다. 이때 실레의 집안 곳곳에는 수백 장의 누드화 스케치와 작업물들이 놓여있었는데요, 종이 속에 새겨진 뒤틀린 자세와 뼈만 앙상한 몸, 옷을 벗고 정면을 응시하는 소년과 소녀들의 앳된 모습들은 그를 순식간에 범죄자로 만들어 버렸답니다.

경찰관들은 “나는 예술가”라는 실레의 변명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레 집안에 있는 모든 그림을 ‘포르노물’이라고 규정하고 닥치는 대로 압수하기 시작했는데요, 약 100점이 넘는 드로잉들이 몰수되었으며, 실레 역시 수갑을 찬 채 경찰서로 끌려가게 된답니다. 동네 주민들은 창문 틈새로 그 장면을 엿보았고, 이미 여러 가출 청소년들이 실레의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봐온 이웃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수군거렸답니다.
에곤 실레, <배를 드러내고있는 소녀>, 1911년. 실레에 몰수된 그림 중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경찰들이 실레의 작업실에서 이런 그림을 봤을 때, ‘그가 범죄자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 그림출처. 레오폴드 미술관
에곤 실레, <배를 드러내고있는 소녀>, 1911년. 실레에 몰수된 그림 중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경찰들이 실레의 작업실에서 이런 그림을 봤을 때, ‘그가 범죄자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 그림출처. 레오폴드 미술관
경찰서에서 집요한 심문을 받던 실레는, 자신이 보고 그린 미성숙한 맨몸이 음란물이 아니라고 해명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처음에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미성년자 의제강간과 미성년자 유괴 두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실레에게 더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가출 청소년들이 그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일종의 아지트로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거든요. 법원에서는 실레가 순수한 아이들 앞에서 그가 그린 선정적인 작업물들을 숨기거나 보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연음란죄’ 혐의를 추가합니다.

다행히 재판이 진행되면서 사건의 전말과 인과관계가 명확해지자, 실레는 앞의 두 가지의 중대 범죄 혐의는 모두 벗게 됩니다. 하지만 공연음란죄만은 유죄 판결을 받아 24일간의 한 줄기의 빛만이 들어오는 유치장에서 구금형을 선고받습니다. 재판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실레가 아닌 판사가 만들었는데요, 도덕적이고 근엄한 판사는 실레의 드로잉 한 장을 재판 중 들어올려 불을 붙입니다. 종이는 금세 까맣게 그슬리며 말려 올라갔고, 판사는 이 행위를 통해 ‘이런 천박한 그림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뜻을 명확히 했습니다.
에곤 실레, <나는 기꺼이 예술과 나의 사랑을 위해서 버티겠노라!>, 1912년. 실레가 노이렝바흐 유치장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자화상으로 그렸다. / 그림출처. 알베르티나 미술관
에곤 실레, <나는 기꺼이 예술과 나의 사랑을 위해서 버티겠노라!>, 1912년. 실레가 노이렝바흐 유치장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자화상으로 그렸다. / 그림출처. 알베르티나 미술관
실레의 재판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그는 ‘퇴폐적인 변태 음란물 작가’라는 모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실레가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이런 상황에 휘말린 그의 당황스러운 심정과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려 한 젊은 예술가인 자신을 짓밟아 죽이려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직접적으로 표현됩니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실레는 이 사건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기억하게 됩니다. 하지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먹이는 당시 사회에 순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타락한 범죄자로 몰아세운 세상에 반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심은 그의 마음속 잠재되었던 ‘순교한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일깨우게 됩니다. 실레의 체포사건은 단순한 법적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가 과거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나체를 그린 창의적인 예술가를 위험한 범죄자로 몰아 그의 작품과 정신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는 과정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 <성 세바스티아누스>, 1475 - 1500년 사이 추정. 성 세바스티아누스(Saint Sebastian)는 로마제국 시절,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다 순교한 성인으로, 나무나 기둥에 묶인 채 수많은 화살을 맞는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중세시절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고통 속의 순교’와 ‘영적 인내’를 상징하는 의미로 그려왔다. / 그림출처. 루브르 박물관
안드레아 만테냐, <성 세바스티아누스>, 1475 - 1500년 사이 추정. 성 세바스티아누스(Saint Sebastian)는 로마제국 시절,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다 순교한 성인으로, 나무나 기둥에 묶인 채 수많은 화살을 맞는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중세시절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고통 속의 순교’와 ‘영적 인내’를 상징하는 의미로 그려왔다. / 그림출처. 루브르 박물관
에곤 실레, <성 세바스티아누스로 표현된 자화상>, 1914년. 실레는 자신이 당한 사회적 박해와 도덕적 탄압을 종교적 순교 이미지로 치환하여, 예술가로서의 고립과 희생을치뤄 ‘성인’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개인 컬렉션 소장
에곤 실레, <성 세바스티아누스로 표현된 자화상>, 1914년. 실레는 자신이 당한 사회적 박해와 도덕적 탄압을 종교적 순교 이미지로 치환하여, 예술가로서의 고립과 희생을치뤄 ‘성인’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개인 컬렉션 소장
실레는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짓밟을수록 더 억세게 돋아나는 잡초처럼,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 날카롭고 단단해졌습니다. 보수적인 사회가 그의 예술적 재능을 꺾으려 하면 할수록, 그는 더 크게, 더 거칠게 몸부림쳤답니다. 어쩌다 그는 이렇게 끝없는 도발과 저항의 화신이 되었을까요?

뒤틀린 삶으로 점철된 반항아

실레의 삶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1890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작은 도시 툴른(Tulln)에서 철도역장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던 매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들이 철도 기술자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실레가 그림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몹시 못마땅해 했답니다. 그는 하루종일 스케치북을 붙잡고 있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 여린 손에서 스케치북을 빼앗아 찢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자식에게 엄했던 아버지였지만, 결국 실레가 열네 살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오랜 기간 앓던 매독에 굴복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 당시에는 치유가 불가능했던 이 무서운 질병은 결코 조용한 죽음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환각과 환청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광기에 사로잡혀 괴성을 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던 실레의 아버지는 서서히 그러나 지독히 고통스럽게 무너져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노후 연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철도회사 주식까지 불에 태워버리며 가세를 무너뜨렸습니다. 매독은 존경하던 아버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이는 실레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평생 성(性)에 대한 불안과 병이 가져오는 죽음, 그리고 육체의 유한성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 입시를 준비한 실레는, 16세에 최고의 미술 학교인 ‘빈 미술 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에 입학합니다. 빈 미술 아카데미는 아돌프 히틀러도 두 번이나 떨어진 곳으로, 최고의 미술 학교로 유명했지만 엄격하고 경직된 전통적인 교육은 곧 그의 숨통을 조였고, 생명력 없는 아카데미 회화에 염증을 느낀 실레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1907년,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실레는 평소 존경하던 구스타프 클림트를 직접 찾아갑니다. 학교 선배이자, 같은 빈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젊고 대담한 예술가가 자신을 너무 좋아해서 찾아왔다는데, 게다가 그의 그림이 기존의 틀을 깨는 독창성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클림트가 매료되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즉각 알아보고, 자신의 작품과 교환하며 피드백을 주었고, 직접 그림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실레를 지인과 후원자들에게 소개했고, 여러 전시에 함께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비록 ‘학부 회화 연작’ 사건으로 인해 공식적인 교수직은 없었지만, 클림트는 사실상 실레의 스승 역할을 충실히 해낸 셈입니다.

실레 역시 참된 스승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는 이러한 감정을 화폭 위에 담고자, 클림트의 대표작 <다나에>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동일한 이름의 <다나에>를 제작합니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 특유의 화려한 장식성과 부드러운 곡선미가 드러나는 한편, 실레 특유의 날카롭고 노골적인 감각이 겹칩니다. 이 한 점의 그림은 클림트가 실레에게 끼친 화풍적 영향과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깊은 예술적 신뢰와 유대를 동시에 증명하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에곤 실레, <다나에>, 1909년, 개인 컬렉션 소장
에곤 실레, <다나에>, 1909년, 개인 컬렉션 소장
에곤 실레, <파란 작업복을 입은 구스타프 클림트>, 1913년, 개인 컬렉션 소장
에곤 실레, <파란 작업복을 입은 구스타프 클림트>, 1913년, 개인 컬렉션 소장
클림트 곁에서 빈 분리파 운동의 뜨거운 열기를 직접 체험한 실레는 덕분에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1909년, 그는 3년 만에 학업을 그만두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신인 예술 단체(Neukunstgruppe)를 결성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뚜렷했습니다. 미화된 기존 아카데미 회화를 타파하고, 가감 없는 진실로 대체하는 것. 이 순간, 실레의 반항심은 비로소 명확한 예술적 선언으로 굳어졌습니다.

클림트가 상징과 금박 속에 생생한 나체를 품어냈다면, 실레는 그 매끄러운 살결을 거두어 내고 껍질을 벗겼습니다. 그는 클림트의 지도 아래에서 색채와 장식적 요소를 섬세하게 조율하는 법을 익혔지만, 그 길 위에서 곧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갑니다. 클림트가 육체 속 빛나는 관능미와 은근한 암시를 탐색했다면, 실레는 자신의 경험을 결합한, 신체 표면 아래 숨겨진 취약함과 고독, 그 한계 속에서 몸부림치는 절박함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각지고 뼈대가 드러나며, 감정의 무게로 팽팽하게 긴장돼 있었습니다. 그 포즈는 친숙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과장되고 도전적이었습니다. 실레 이전 그 누구도 그리지 않았던 독창적인 스타일이 탄생한 겁니다.

욕망의 끝자락: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그래피

실레의 세계는 위험하고 적나라한 에로티시즘으로 가득합니다. 이 세계로 입장하는 순간, 우리는 매혹과 불쾌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뒤엉킨 신체와 시선을 무시한 채 진행되는 성행위, 그리고 섬뜩하게 과장된 표정과 시선은 상투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합니다. 날고기 같은 육체와 그 욕망만이 화폭을 채우며, 그 속의 인물들은 혼미한 표정만 지을 뿐입니다. 그의 이런 인체 탐구는 20세기 초 빈 사회의 양면성을 그대로 비춥니다. 당시 빈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만남과 성적 해방이 점점 확산되던 도시였지만, 동시에 종교적·도덕적 이유로 방탕함을 엄격히 금지하는 보수적 기류도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실레는 이처럼 상반된 흐름 속에서, 그러한 엄격한 시선을 피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던 이들의 모습을 날카롭고도 솔직하게 포착했습니다.
에곤 실레, <레즈비언 연인들>,1914년, 개인 컬렉션 소장
에곤 실레, <레즈비언 연인들>,1914년, 개인 컬렉션 소장
실레는 같은 성별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몸을 맡기는 장면을 그리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그러한 장면은 금기나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작품의 동성애적 성향을 문제 삼으려 하면 그는 능청스럽게 ‘그저 아주 친한 친구를 그린 것’이라며 작품에 ‘우정(Freundschaft)’과 같은 제목을 붙여, 교묘하게 비난을 피해갔습니다.

동성애적 주제가 발견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레즈비언 연인들>입니다. 여기서는 두 여인은 나체로 서로를 탐하듯 끌어안고 있으며, 대담한 윤곽선과 최소한의 채색만으로 그 관계의 친밀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그녀들의 팔다리는 느슨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매듭을 이루고, 누그러진 색채 속에서 특히 빨간 모자를 쓴 아래쪽 여인의 얼굴이 자연스레 시선을 붙잡습니다. 실레 특유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한 구도를 만들어내며, 현실과는 한 발 떨어진 몽환적이고도 은밀한 분위기를 작품 전반에 불어넣습니다.
에곤 실레 <성교>, 1913년 / 그림출처. 레오폴드 미술관
에곤 실레 <성교>, 1913년 / 그림출처. 레오폴드 미술관
실레의 손에서는 천박함과 아름다움은 끊임없이 맞물렸습니다. 마치 동전을 뒤집듯, 외설과 예술의 경계가 앞뒤로 뒤바뀌며 혼란을 야기합니다. 어느 순간엔 외설처럼 보이다가도, 다음 순간엔 묘하게 예술로 굴절되어 보이는 이 이상야릇한 느낌은 남자와 여자 간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섹스를 하나가 되는 화합의 순간이 아닌, 절박하고 노골적인 욕망의 몸짓으로 묘사했습니다.

남녀가 뜨거운 애무 속 감정이 격해지고 본격적인 성행위를 하기 전 누군가에게 ‘딱 걸린’ 그 부끄럽고 어색한 찰나의 순간조차도 <성교> 속에 여과 없이 기록합니다. 마치 옷을 막 벗고 본격적인 ‘일’을 하려다가 누군가가 들이닥친 듯, 남성과 여성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긴장감이 팽배합니다. 여성은 무표정하지만, 빤히 정면을 쳐다보고 있으며, 남성은 살짝 시선을 피한 채 입을 벌리고 고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민망하기보다 ‘걸렸네…이제 어쩌지?’라고 되물으며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는 듯합니다. 비록 두 인물이 완전히 나체로 있지는 않지만, 벗겨지고 있는 옷자락과 다리와 팔을 이리저리 더듬는 듯한 역동적인 포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숨겨진 ‘보면 안 될 순간’을 훔쳐보다가 발각된 듯한 야시시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딱 걸린 순간’의 초조함과 불순한 의도는 1년 전 작품인 <애무(추기경과 수녀)>에서 이미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어두운 검녹색 배경 속 전신을 빨간색으로 치장한 추기경(실레 자신)이 검은 수도복의 수녀(연인 발리)를 가까이 끌어와 취하려 합니다. 수녀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했는지 놀란 듯 고개를 돌리지만 이미 관객들은 그들의 불경한 행위를 목격합니다. 기도하는 듯한 모양을 한 손은 이미 서로의 몸을 갈구하고 있으며, 추기경의 권위와 하느님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붉은 색은 이제 그의 불타는 욕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서로의 종아리와 맨발은 색정적인 분위기를 한 층 더 고조시킴과 동시에 육체적 죄악을 상징합니다.

그의 스승인 클림트가 그린 명작 <키스>의 안티테제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클림트가 황금빛 장막 속에서 사랑을 신성하고 숭고하게 찬미한 것과는 반대로, 사랑을 종교적 위선과 육체적 갈망의 충돌 속 칙칙함으로 끌어내립니다. <애무(추기경과 수녀)>에 드러난 불경한 제스처 속에는, 실레가 가톨릭적 도덕관에 품었던 깊은 반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는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지만, 금욕과 도덕을 강요하는 종교적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노이렝바흐 감옥에서 출소한 뒤, 보수적 사회와 이를 뒷받침하는 종교에 대한 반항심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추기경의 형상을 빌려 스스로를 신성 모독의 행위 속에 놓았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외설을 넘어,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시각적으로 폭발시킨 걸작입니다.
[좌] 에곤 실레, <애무(추기경과 수녀)>, 1912년 / 그림출처. 레오폴드 미술관  [우]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08년 / 그림출처. 벨베데레 궁전
[좌] 에곤 실레, <애무(추기경과 수녀)>, 1912년 / 그림출처. 레오폴드 미술관 [우]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08년 / 그림출처. 벨베데레 궁전
실레는 자화상도 많이 남겼습니다. 몇 안 되는 예술가만이 에곤 실레처럼 타협 없는 정직함과 극적인 모습으로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습니다. 생전 그는 약 200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으며, 그 속의 실레는 단순히 점잖고 온화한 모습으로 자신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뛰어난 예술가라 여겼던 그는 마치 자아도취에 빠진 듯 틈만 나면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살폈는데요, 그는 자신의 몸을 확대하고, 해부하고, 왜곡하며, 고뇌와 에로티시즘, 심리적 붕괴를 상징하는 원초적인 것들만 남긴 형상으로 자신을 변모 시켰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과장된 동작과 기묘한 자세를 받아들인 자아를 선보였고, 이를 본 관중들을 꺼림칙하게 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했습니다.
에곤 실레, <찡그린 얼굴의 누드 자화상>, 1910년 / 그림출처. 알베르티나 미술관
에곤 실레, <찡그린 얼굴의 누드 자화상>, 1910년 / 그림출처. 알베르티나 미술관
실레는 당대의 예술가들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을 시도합니다. 바로 스스로를 성적으로 만족시키는 행위까지 화폭 속에 담아버린 건데요, 그 대표적인 예가 <자위하는 자화상>입니다. 그는 쾌락의 원천인 자신의 성기에 손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정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반복할수록 얼굴에는 그저 자신을 더 추악한 괴물로 만드는 피로만이 드리울 뿐입니다. 여기서도 실레는 자신을 전혀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그림 속에서만큼은 고통에 찬 듯 일그러진 표정과 병약해 보이는 피부, 긴장으로 뒤틀린 앙상한 사지를 드러냅니다. 실레 특유의 날카롭고 거친 윤곽선은 인물의 불안정한 심리와 동물적 성적 충동을 더 지저분하게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자기 위로를 하는 순간이 즐거운 향락이라기보다는 성욕에 굴복하는 자기 혐오가 뒤섞인 절망의 순간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성병으로 고통받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책임 없는 성적 욕망을 즐기면 그 욕망이 자신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말이지요.

이러한 자기 해부는 <에로스>에서도 반복됩니다. 동일한 복장을 입은 실레는 보다 더 여위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위하는 자화상>과는 다르게, 자신의 발기된 붉은 성기를 더 노골적으로 들이밉니다. 의도적인 자신의 매력을 걷어내고, 자신의 뒤틀린 내면과 자기 파괴적인 두려움을 솔직하게 제시합니다.
[좌] 에곤 실레, <자위하는 자화상>, 1911년 / 사진출처. 알베르티나 미술관  [우] 에곤 실레,<에로스(자화상)>, 1911년, 개인 컬렉션 소장
[좌] 에곤 실레, <자위하는 자화상>, 1911년 / 사진출처. 알베르티나 미술관 [우] 에곤 실레,<에로스(자화상)>, 1911년, 개인 컬렉션 소장
너무나도 일렀던 퇴폐예술가의 죽음

1918년,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실레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는 임신 6개월째인 아내 에디트를 잃었고, 곧이어 3일 뒤, 자신도 스물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불과 10년 남짓의 활동 시기 동안 3,000점 이상의 드로잉과 300점 이상의 회화를 남겼습니다. 양적으로도 놀라운 수치였지만, 그것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실레의 작품은 급진적으로 실험적이었고, 내밀하며, 종종 불편할 정도로 직설적이었습니다. 그는 세기말 빈 사회의 단정한 외피를 벗겨내고 그 속에 숨겨진 강박, 성욕, 부패, 욕망, 그리고 죽음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의 선은 심리적 긴장으로 떨렸고, 그의 인물들은 구부러지고, 뒤틀리고, 웃음을 잃은 채,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산에 대하여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일부는 그를 에로티시즘과 예술적 취약성을 가장 대담하게 탐구한 인물로 찬양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를 여성에 대한 착취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예술가로 비판합니다. 특히 2017년, 전 세계로 확산된 ‘미투(Me Too)’ 운동은 예술계를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과거의 성추행, 성희롱 사례를 다시 조명하게 했습니다. 실레 역시 일부에서는 여성 모델을 대하는 방식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의 이름이 예술계의 ‘나쁜 선례’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그를 깊이 연구해 온 전문가들은 시대적 맥락과 작품 세계를 고려해야 한다며 해명에 나서야 했습니다. 만약 그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그는 자신의 의도와 예술관을 직접 설명하고 변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단명했고, 그 해명은 끝내 그의 입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과 예술은 여전히 불완전한 문장처럼 남아 오늘날까지도 해석과 논쟁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지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