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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만 한다! 밀란 쿤데라도 인용한 베토벤의 마지막 문장

[arte] 박소현 - 백조의 노래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베토벤의 유작 <현악사중주 16번>
우리에게는 ‘음악의 성인’, 즉 ‘악성 (樂聖)’이란 별명으로 익숙한 독일 출신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바흐, 모차르트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사람입니다. 독일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아들에게서 전 유럽을 유명세로 물들였던 신동 모차르트와 같은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 (Johann van Beethoven, 1770~1827)의 혹독한 교육 지침으로 피아노는 물론 오르간, 바이올린, 비올라 등의 악기를 수많은 뛰어난 음악가들에게 수학하였습니다. 그렇게 어린 신동이란 이름으로 연주 무대에 올라갔던 베토벤은 10세의 나이에 작곡도 배우기 시작하여 13세의 나이에 자신의 첫 작곡 작품인 <레슬러 행진곡 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이 출판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고전 음악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행을 하고 있었고, 그 세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연주 여행 중 본을 들린다는 소식은 젊은 청년이 된 베토벤에게는 자신의 작품들을 평가받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 두 편을 하이든에게 선보인 20대의 젊은 베토벤, 그의 작품은 하이든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빈으로 오면 자신의 제자로 삼고 그의 성공을 돕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1792년, 20대 후반의 베토벤은 독일 본을 떠나 음악의 도시이자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하이든을 비롯하여 살리에리, 바이올리니스트 이그나츠 슈판치히 등의 지도와 베토벤의 재능을 눈여겨본 여러 귀족들의 후원으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페르디난트 발트뮐러가 그린 베토벤의 초상화 (사망하기 3년 전의 모습) / 출처. Wikimedia Commons
오스트리아의 화가 페르디난트 발트뮐러가 그린 베토벤의 초상화 (사망하기 3년 전의 모습) / 출처. Wikimedia Commons
성공 가도를 달리며 큰 액수의 돈을 벌던 것도 잠시, 1795년에서 1797년 사이, 베토벤은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그의 청력 이상은 그 이후일 것이라는 주장도 신빙성이 있습니다. 영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찰스 니트 (Charles Neate, 1784-1877)는 1815년부터 1년간 빈에서 지냈는데 그 시기에 베토벤과 매우 가까워졌으며, 베토벤이 1798년경 어느 한 성악가와 다툼을 벌이다 발작이 일어났으며 그 발작 때문에 청력 이상이 일어났다란 말을 찰스 니트에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의 청력 문제는 나아지지 않고 점차 악화가 되었으며, 결국 거의 듣지 못하여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은 물론 작곡가로서의 삶도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죠. 하지만 그는 그러한 운명에 맞서겠다는 의지로 휴양을 위해 떠난 하일리겐슈타트 (Heiligenstadt)에서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Heiligenstädter Testament)’를 쓰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4개의 음으로 구성된 교향곡 5번 <운명 교향곡>과 6번 <전원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죠.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9번 <합창> 등 9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템페스트 소나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인 <열정 소나타>까지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6개의 피아노 협주곡, 10개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5개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번호가 붙여진 7개의 피아노 트리오를 비롯하여 10곡이 넘는 피아노 삼중주 곡들과 같은 실내악 작품들, 그리고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 극 음악인 <에그몬트>, <아테네의 폐허> 등을 우리에게 남긴 베토벤은 사망 후 장례식에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할 정도로 당시에도 큰 사랑을 받았던 음악가였습니다. 베토벤의 사인은 납중독, 선천적으로 부모에게서 받은 매독설 등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두 번의 발굴과 조사 작업이 이뤄졌음에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오스트리아 조각가 프란츠 자버 슈퇴버가 그린 베토벤의 장례 행렬(1827년작) / 출처. Wikimedia Commons
오스트리아 조각가 프란츠 자버 슈퇴버가 그린 베토벤의 장례 행렬(1827년작) / 출처. Wikimedia Commons
베토벤은 건강이 악화되었던 말년에는 ‘실내악의 꽃’이라고 불리는 현악사중주 작품에 매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총 16곡의 번호가 부여된 현악사중주 작품과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9번>을 현악사중주 버전으로 편곡했기 때문에 번호가 붙지 않은 1802년에 완성한 <현악사중주 바장조 (String Quartet in F Major)>, 그리고 <현악사중주를 위한 대푸가, 작품번호 133번 (Grosse Fuge für Streichquartett in A flat Major, Op.133)>까지 총 16개의 현악사중주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완성한 마지막 현악사중주 작품이자 그의 유작, 백조의 노래가 된 작품이 바로 그가 사망하기 5개월 전인 1826년 10월에 완성한 <현악사중주 16번 바장조, 작품번호 135번 (String Quartet No.16 in F Major, Op.135)>입니다.
베토벤 <현악사중주 16번> 자필 악보 / 사진. © Beethoven-Haus Bonn
베토벤 <현악사중주 16번> 자필 악보 / 사진. © Beethoven-Haus Bonn
1악장 ‘알레그레토 (Allegretto)’, 2악장 ‘비바체 (Vivace)’, 3악장 ‘렌토 아사이, 칸탄테 에 트란퀼로 (Lento assai, cantante e tranquillo)’, 4악장 ‘괴로움 속에 간신히 굳힌 결심. 그라베, 마논 트로포 트라토 - 알레그로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 Grave, ma non troppo tratto – Allegro)’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토벤의 열렬한 팬이자 후원자였던 요한 네포무크 볼프마이어 (Johann Nepomuk Wolfmeyer)에게 헌정된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은 이 곡의 정체성과 마지막을 직감한 듯한 베토벤의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악장입니다. 그가 직접 쓴 ‘괴로움 속에 간신히 굳힌 결심’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지만 느린 도입부에는 ‘그래야만 하는가? (Muss es sein?)’를, 그리고 빠른 주선율이 등장하는 부분의 악보에는 ‘그래야만 한다! (Es muss sein!)’이란 구절을 써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도 등장하며 많은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평생 고난과 역경에 맞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투쟁을 이어갔던 베토벤이라는 백조가 외친 마지막 노래인 유작 <현악사중주 16번>은 그의 진지하면서도 삶을 초월한 드높은 어딘가에서 영원히 빛날 그의 음악의 마지막 페이지를 완벽하게 완성한 작품일 것입니다.

[알반베르크 사중주가 연주하는 베토벤 <현악사중주 16번>]
[빈 필하모닉이 번스타인의 지휘에 맞춰 연주하는 베토벤 <현악사중주 16번>(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

박소현 작가•바이올린/비올라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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