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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엔 없는 단종…유해진·박지훈의 세대 초월 앙상블 '왕과 사는 남자' [김예랑의 무비라운드업]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 제6대 왕 단종 이홍위의 유배 시절을 스크린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단종은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권좌를 빼앗긴 뒤 유배돼 1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군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기존 사극들이 계유정난 전후의 정치적 격변과 권력 다툼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왕좌에서 밀려난 이후의 시간, 한 인간으로 살아간 단종의 마지막 여정에 시선을 둔다. 이야기는 1457년, 궁을 떠나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향하는 어린 선왕의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화려한 궁궐이나 치열한 정치의 현장을 과감히 비켜서, 산골 마을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에 집중한다. 유배지 광천골에서 단종은 더 이상 왕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그를 감시하고 보살피는 촌장 엄흥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과의 일상에서 단종은 처음으로 명령이 아닌 선택, 권력이 아닌 관계를 경험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왕 단종'이 아닌 '소년 이홍위'의 얼굴을 차분히 드러낸다.
장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경계를 정교하게 조율하는 데 공을 들였다고 밝혔다. 그는 "작품을 준비하며 여러 역사학자의 자문을 받았다.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 상상할 수 있는 지점을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했다"며 "실록에 남아 있는 문장들은 짧지만, 그 사이의 공백에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행간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엄흥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실록에는 '노산군이 돌아가셨을 때 엄흥도가 슬퍼하며 곡을 하고 시신을 수습한 뒤 숨어 살았다'는 정도만 기록돼 있다. 그 짧은 문장 속 감정을 영화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영화의 중심에는 광천골 촌장 엄흥도를 연기한 유해진과 단종 이홍위 역의 박지훈이 있다. 장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부터 엄흥도는 유해진을 떠올리며 작업했다. 인간적인 온기와 삶의 결이 묻어나는 얼굴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본을 건네며 많이 떨렸는데, 흔쾌히 '하고 싶다'고 답해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박지훈은 단종 이홍위를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그려내며 또 한 번의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그는 "단종이라는 인물을 특별하게 만들기보다는, 유배지에 놓인 한 인간 이홍위를 솔직하게 표현하려 했다"며 "과거의 왕이라는 무게보다, 그 나이의 소년이 느낄 외로움과 두려움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화를 보며 눈물이 났다. 이홍위에게 엄흥도는 어쩌면 아버지 같은 존재였을 것이고,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전해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관계성은 세대를 뛰어넘는 연기 앙상블의 힘을 증명한다. 장 감독은 "현실에서도 두 사람은 부자 관계처럼 보였다.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그 분위기가 그대로 영화에 담겼다"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금성대군 역의 이준혁, 노루골 촌장으로 특별 출연한 안재홍 등 탄탄한 조연진이 극에 생동감을 더한다. 장 감독은 "금성대군은 실현되지 못한 정의를 품은 인물이다. 왕족의 기품과 이상을 동시에 표현할 배우가 필요했고, 이준혁이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안재홍에 대해서는 "특별 출연을 부탁하자 고민도 하지 않고 노루골 촌장 역할을 선택하더라. 유해진과는 또 다른 색의 촌장을 보여줬다"고 전했다.
장항준 감독은 "이 영화가 거창한 교훈을 주기보다는, 한 인간의 시간을 함께 걸어본 느낌으로 남았으면 한다"며 "간절히 손익분기점을 넘어 침체된 한국 영화계에 밀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