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제77회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초청돼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노라>와 경합을 벌였던 작품이 있다. <바늘을 든 소녀>다. 어감상 ‘바늘을 갖고 있던 여자’라는 제목이 영화의 내용에 더 잘 부합한다. 주인공인 카롤리네(빅토리아 카르멘 손네)는 원래 리넨을 만드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키츨러 봉제공장의 여공이었다. 1차 대전 중에는 제복을 만드는 공장이었으니 ‘바늘을 든 소녀’가 틀린 말까지는 아니다. 제복이 두꺼워 여공들의 재봉틀 바늘이 자꾸 부러진다. 그러나 정작 영화에서 얘기하는 ‘바늘’은 엄청나게 긴 뜨개질용으로 여성의 생식기를 지나 자궁 안의 아이까지 찌를 수 있는 길이의 것이다. 카롤리네는 공중목욕탕 욕조에 들어가 이제는 임신중절을 하기에도 시기가 지난 자신의 태아를 꼬챙이 같은 바늘로 죽이려 한다. 그러니 영화의 의미는 ‘바늘을 갖고 있던 여자’가 맞다.

영화는 자칫하면 연쇄 영아 살인의 얘기를 그리는 공포영화가 될 뻔했다. 카롤리네가 만나고, 처음엔 그녀를 돌봐주는 척 인면수심을 한 여자 다그마르 오베르뷔(트리네 뒤르홀름)의 영아살해 방식, 과정, 은폐, 시체 유기 방식이 자세히 묘사됐다면 영화는 가장 끔찍한 연쇄살인 극이 됐을 것이며 어쩌면 다소 상투적인 20세기 초의 범죄 스릴러가 됐을 수도 있다. 이런 사건을 모티프로 한 남성형 영화로는 잭 더 리퍼 얘기들이 있다. 잭 더 리퍼는 1880년대 잉글랜드 런던 이스트엔드 뒷골목 윤락가를 돌며 매춘부만 연쇄적으로 살해한 범죄자이다. 영아를 살해한다는, 그 대상만이 다를 뿐이지 <바늘을 든 소녀>도 비슷한 이야기 구조가 될 뻔했다.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Lukasz Bak/IMDb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Lukasz Bak/IMDb
<바늘을 든 소녀>는 마치 아마추어 감독이 만든 것처럼 중반 이후 서사의 일관성이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서사의 주체가 카롤리네에서 다그마르로 옮겨 가면서는 더욱 그렇다. 시점도 흔들린다. 처음엔 카롤리네를 둘러싼 이야기를 중심으로 1차 대전 전후, 한 여성에게 가해진 잔혹한 일대기처럼 그려진다. 일종의 ‘여인 잔혹사’이다. 전쟁에 나간 남편은 전사했는지, 어디론가 실종이 됐는지 알 수가 없다. 카롤리네는 집세가 14주간 밀렸다가 결국 집주인에게 쫓겨난다. 집주인도 그리 모진 사람은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게 다들 여간 어려운 상황이 아니다. 전쟁이든 재난이든 대공황이든 직격탄을 맞아 더 못 먹고, 더 못 살게 되는 이들은 하층계급 사람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여자들 뿐이다. 카롤리네에게는 미망인 연금도 나오지 않는다. 남편이 전사자 처리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당연히 남자가 접근한다. 키츨러 공장의 사장이자 사주의 아들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힘들면 자신에게 기대라 하고 여자는 결국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되지만, 그래서 잠깐이나마 행복하거나 부유하게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지만, 카롤리네에게는 영락없이 두 가지 일이 겹쳐서 벌어진다. 죽었다고 생각한 남편이 얼굴 반이 날아가 ‘괴물’이 된 채 돌아온다. 카롤리네는 그를 향해 사라지라고 고래고래 소리친 뒤 공장 사장과 결혼하려 하지만 이번엔 그의 엄마에게 가차 없이 내쫓김을 당하고 만다. 믿었던 남자 사장, 그 아들은 그저 울상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만 중얼거린다.

이 와중에 만난 것이 다그마르란 중년 여성이다. 카롤리네는 감자 창고에서 일하다 애를 출산한 후 다그마르를 찾아가 아이 입양을 부탁한다. 다그마르는 사생아를 받아 불법으로 입양시키는 일을 한다. 젖이 나와 곤란을 겪던 카롤리네는 다그마르가 운영하는 사탕 가게에 머물며 임시 보호하는 아이들에게 젖 먹이는 일을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롤리네는 그 과정에서 모성의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그 상황에서 급속하게 다그마르 쪽으로 옮겨 오기 시작한다. 다그마르가 영아들을 어디론가 보내긴 하는데 석연치 않은 점, 결국 그녀가 아이를 죽이고 있다는 점 등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IMDb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IMDb
이런 얘기를 그릴 때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프레임이 동원된다면 <바늘을 든 소녀> 같은 서사는 다소 기이해 보인다. 카롤리네와 다그마르의 얘기가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다그마르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그 범행의 동기를 들여다보는 데 주력한다. 그것도 단 한 번에 밝혀내는 식이 아니다. 다그마르는 아이를 난로에 넣고 태워서까지 죽이는 잔혹성을 보이는데 그녀가 그렇게 하는 심리적 과정을 차곡차곡 보여 주려 한다. 영화가 특이한 것은 그 지점이다. 다그마르의 심리, 그녀를 바라보는 카롤리네의 심리. 두 여인의 심리는 양면성이다. 카롤리네는 아이를 버리고, 다그마르는 아이를 죽인다. 그것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모성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위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상당히 시대적이며 사회구조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모성애라는 것이 시대를 진보시키거나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시대의 올바른 선택이 사람들의 모성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 시대와 모성, 모성과 시대는 변증법적 관계이지, 일방적인 무엇이 아니다. 이 영화의 태도가 돋보이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엔딩 씬은 모성이야말로 시대를 올바로 바꿔내기도 하지만, 시대의 변화가 모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 준다. 그 엔딩 컷은 최근 나온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감동스럽고 진실된 것이다.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IMDb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IMDb
영화 전체를 흑백으로 찍은 것은 다소 과도한 몰입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910년대 후반(1차대전은 1918년 11월 11일에 끝났다)이라는 척박한 공간의 무서움, 억압과 탈진의 분위기를 그려내는데 적격이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총천연색일 수 없다. 인간의 꿈은 흑백이다. 꿈은 과거에 대한 명징한 무엇의 흔적만을 기록한다. 황량한 시대일수록 세상은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고 소유로 나누며 성별로 나누고 성인과 유아로 나눈다. 엄마는 아이라도 따귀를 서슴없이, 코에서 피가 날 정도로 갈기던 시대이다. 여자들은 계급에서도 밀리고 사회관계에서도 실질적인 권리를 갖지 못하던 때이다. 여성 참정권도 20세기 초 유럽 각국에서 제한적으로 실현됐던 참이다. 임신의 책임도 여자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던 때이다. 카롤리네는 감자 더미에서 아이를 낳고 남자(들)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남자들이란, 남들에게 다 보이는 골목 안에서 성적 욕구를 여자에게 쏟아 내는 동물에 불과할 뿐이다.

사랑이든 모성이든, 시대와 자본, 사회의 상부구조가 세련화하는 과정에서 개념이 다듬어지고 교육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진실한 모성이란, 시대에 대한 통찰 없이는 올바르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롤리네는 살기 위해서 자기 몸을 의탁하고 애를 가졌고, 그 애를 사산하려 했지만 실패했으며 결국 태어난 아이를 몰래 입양시켰다. 그건 몰래 버린 것이며 사실상 영아 살해와 맥이 통한다. 다그마르가 저지른 영아 살해의 동기는 선량한 사람이 아이를 데려가고 의사나 변호사 같은 좋은 집안으로 아이들이 가게 될 것이라는 걸 믿었느냐는 힐난에 숨어 있다. 그게 (이런 시대에) 당최 가능한 것이냐며 아이들은 결국 버림받고 고통받으며 학대받다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이 차마 못 할 일(애들을 버리고 죽이는 일)을 내가 대신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IMDb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IMDb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IMDb
영화 '바늘을 든 소녀' 스틸 컷. / 사진. © IMDb
모성을 회복하는 것은 시대를 회복하는 것이다. 시대의 회복 없이는 자식들에 대한 엄마의 걱정과 한숨,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시대가 엄마들의 바람을 저버리는 야만의 환경에서 벗어난 지 갓 100년이 됐다. 근데 과연 벗어나긴 한 것일까. 이 영화를 만든 감독 마그누스 본 혼은 러-우 전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쟁의 시대가 재개됐고, 모성이 짓밟히는 세상의 야만이 다시 범람하리라는 걱정이 영화 전편에 담겨있다. 다만, 다그마르 실화는 다소 소재주의로 보인다. 카롤리네의 얘기로 집중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술영화지만 그리 굳세게 보이지는 않는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