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면 유럽 거리의 곳곳에서 맡아지던 뱅쇼(각종 과일을 넣고 끓인 따뜻한 레드와인, 독일어로는 글뤼봐인이라고 부른다)의 냄새와 도시를 아름답게 장식했던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들이 생각난다. 비가 자주 내렸던 곳들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빗물 웅덩이에 비친, 전구의 빛을 반사하는 내 모습도 떠오른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나에게 12월은 항상 낭만의 달이었다. 10월 마지막 주에 유럽의 서머타임이 해제되면 저녁은 유난스럽게 빨리 찾아오고, 어느새 바람도 점점 차가워지면 도시 곳곳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다. 털모자와 장갑, 목도리로 무장을 하고 찾은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주전부리를 먹으면서 뱅쇼를 한잔 마시면 ‘아, 올 한해도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 12월은, 유럽에서도 영국이다. 매년 겨울 초입에 영국 런던에서 개최되는 WTM(World Travel Market)에 여러 번 참석해서 그 풍경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있고, 또 이제는 15년이 다 되어가는 습관을 넘어선 내 12월의 Ritual(의식) 때문일 것이다. 온돌이 없는 추운 베를린 기숙사에서, 나는 한국에서 공수해온 작은 전기장판에 누워서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크리스마스 영화 <러브액츄얼리>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매년 12월이면 그 영화를 다시 보았고, 올해는 한국의 따뜻한 나의 침대에서, 귤을 까먹으면서 <러브액츄얼리>를 봤다.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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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나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전 세계를 떠돌게 되었을까.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책장을 바라보다가 ‘아니, 이 책이 어떻게 아직도 여기에…?’라고 생각하면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홀린 듯이 꺼내 보게 되었다. 스위스 출신이지만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까지도 런던에서 살고있는 작가이다. 지금은 산뜻한 하늘색의 청미래 출판사에서 나온 2025년 개정판을 살 수 있지만, 내 책은 이레 출판사에서 나온, 무려 2004년 7월 판이었다. 그때 불현듯이 떠올랐다. 이 책은 내가 성인이 되고 읽은 나의 아주 첫 책 중에 하나라고.

샤를 보들레르(1821~1867, 프랑스 시인)는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 석 달 동안 바다를 가로지르던 배는 폭풍을 만나 수리를 하기 위해 모리셔스에 들렀다. 이곳은 보들레르가 꿈꾸던, 숲이 울창하고 가장자리에 야자나무가 늘어선 섬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기력과 슬픔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 그러나 그는 여행을 하고 싶은 욕망에는 항상 공감했으며, 늘 그런 바람에 사로잡혀 있었다. …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과 관련된 책의 소주제를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으로 정하고 각각의 챕터에 한군데 혹은 여러 군데의 ‘장소’와 예술가 혹은 학자인 ‘안내자’를 정해서 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프랑스의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린 마음이지만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을 나 역시도 느꼈었다.

권태를 느끼는 삶의 순간,
결국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


여행과 해외에서의 일상을 많이 사랑했던 나였지만, 요즘은 여행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에서 흥미를 잃어가는 권태와 무기력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타파하고자 한 회사에서 10주년을 재직한 기념으로, 무려 2주의 휴가를 받은 동생네 식구의 2025년 연말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을 따라가기로 했다. 유럽, 아시아, 북미, 남미, 심지어 아프리카와 인도양까지 다녀왔던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대륙이 호주 대륙이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절대로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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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나의 기능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생네 가족은 첫 긴 가족 해외여행인 만큼 열심히 동선을 짜고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준비하는데, 나는 그만큼의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해야 하는 일을 미루기 일쑤였고, 결국 몇 군데 중요한 장소는 이미 표가 마감되어서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나의 책장에서 다시 만났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부터 ‘세계전도’가 책상 유리판 밑에 깔려있던 내가, 막 성인이 되어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었던 그 책이었다. 연필로 밑줄이 죽죽 그어져 있는 수많은 문장 속에서, 나는 20년도 더 된 나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캠핑카로 누릴 뉴질랜드 남섬의 숭고한 장소들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갈망했으나 얻지 못했던 것들을 위해서

알랭 드 보통은 책에서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새로운 경험은, 얻고자 갈망했으나 그러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내가 열광한 것은 그런 경우였다. 그것은 영국에 대한 나의 불만과 관련되어 있었다. 현대성이나 미학적 단순성의 결여, 도시적 삶에 대한 저항, 그물 커튼을 걸어두는 심리에 대한 불만.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들을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영화나 책과 같은 예술이 될 수도, 혹은 음식이나 운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가장 사랑하면서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해왔던 일들이, 내 일상의 권태와 갈망을 해결하기 위한 소중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늦었다는 혹은 생업을 이유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2026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내가 사랑하는 것’을 오래 지켜나가면서 해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길.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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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경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