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전국의 콘서트홀에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울려 퍼진다. 이제는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적 전통이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한 해를 마음으로 정리하기에 이 곡만큼 맞춤한 작품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곡 4악장의 가사를 이루는 ‘환희에의 송가(An die Freude)’는 독일 문호 실러가 프랑스 혁명 발발 4년 전인 1785년 드레스덴에서 쓴 시다. 이 해 26세의 청년이었던 실러는 봉건 왕정의 억압을 해소하고 만민의 평등한 결합을 염원하는, 계몽주의적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베토벤은 젊었을 때부터 실러의 이 시를 좋아했던 듯하다. 그가 스물세 살 때 이미 그의 친구가 실러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베토벤이 이 시에 곡을 붙이려고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베토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베토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후 틈틈이 베토벤은 생각날 때마다 이 시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적어두었다. 28세와 42세 때 쓴 메모에도 ‘환희에의 송가’에 부친 선율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멜로디와는 다르다.

실러가 본래는 시에 ‘환희(Freude)’가 아닌 ‘Freiheit(자유)’라는 단어를 써서 ‘Ode an die Freiheit(자유의 찬가)라고 썼다가 봉건 왕정의 검열에 걸릴 것을 우려해 ‘환희’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를린에서 이렇게 가사를 바꿔 연주했다.

이 말은 타당성이 있게 들린다. 기쁨은 해방을 가져오는 도구라기보다는 해방된 뒤에 돌아오는 결과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증거는 없다. 실러와 관련된 문헌에서 “실러가 당초에는 ‘자유에의 송가’로 썼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 문제는 잠시 미뤄두자.

1808년, 38세 때 베토벤은 ‘합창환상곡(Chorfantasie·Choral Fantasy)’을 쓴다. 정식 명칭은 ‘피아노, 독창진, 혼성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 Op.80’이다. 이 곡은 피아노 독주로 시작해서 남녀 독창이 나오고 합창이 나오며, 오케스트라와 함께 고조되어 끝난다. 합창교향곡의 쌍둥이 또는 씨앗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선율이 합창교향곡 4악장의 코랄 선율과 매우 닮았다.

[베토벤 ‘합창환상곡’]

가사의 뜻은 이렇다.

“우리 삶의 화음이 우아하게 울려 퍼진다/아름다움의 감각이 영원한 꽃을 피우고/평화와 즐거움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물결치는 파도와 같이/거칠고 사나웠던 모든 것은/고귀한 즐거움으로 변하노라/음악의 마력과 거룩한 언어가 지배하는 곳에는/고귀함이 모습을 드러내고/밤과 폭풍은 빛으로 변하도다/외적인 평화와 내적인 열락은/행복한 자를 지배하나니/봄날의 햇살 아래 예술은 빛을 던지도다.”

이 가사는 시인 크리스티안 쿠프너 또는 오페라 ‘피델리오’의 대본을 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트라이치케가 쓴 것으로 보이지만 베토벤이 기본적인 내용을 주문해서 이에 맞춰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곡은 단지 베토벤이 ‘합창교향곡’을 쓰기 전 단계에서 시험 삼아 쓴 ‘미니 합창교향곡’일까? 당시 독일 이상주의(理想主義·idealism) 사상가들의 관념을 탐구해 보면 ‘합창교향곡’은 ‘합창환상곡’과 함께 있음으로써 완성된다고, 또는 그 의미가 한층 완전해짐을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을 적용해 두 작품을 살펴본 사람이 독일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간 의아하게 생각된다.

베토벤 당시의 독일은 이상주의적 관념론의 황금기였다. 이상주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은 이상적인 인간을 ‘투트랙’으로 탐구했다. 먼저 이상적인 개인이 있고, 그 뒤에 이 개인들이 모인 이상적인 인류가 있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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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가 일생을 바쳐 쓴 대작 ‘파우스트’를 예로 들어보자. 시작은 철저히 개인적인 지점에서 시작한다. 바로 청춘을 되찾으려는 욕망이다. 그러나 실제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인류’를 자각했을 때였다. 간척사업을 펼쳐 많은 사람들이 새로 얻은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본 파우스트는 환희에 겨운 나머지 ‘멈춰라 순간이여’라고 외친다. 악마와의 계약에 따라 그가 이 말을 하면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그가 희생시킨 여인 그레첸이 성모에게 탄원을 한 결과 파우스트는 구원을 받게 된다.

베토벤은 2026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숨은 주인공으로 새삼 화제가 되기도 한 이상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하늘에는 빛나는 별, 내 마음에는 빛나는 도덕률’이라는 말을 자신의 작업대에 붙여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칸트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도덕 법칙인 ‘정언 명령’에 따라 의무를 실현할 때 도덕적으로 완성된 개인, 즉 이상적 인격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적 경험이 도덕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아름다움을 누리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환희에의 송가’를 쓴 실러도 ‘인간은 놀이(Spiel·Play) 충동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 미적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완전한 인간(개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 말들은 ‘합창환상곡’의 가사를 상기시킨다. ‘합창환상곡’의 가사가 표현한 이상적 개인은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 내면적으로는 기쁨을 갖고 있으면서 외면적으로는 평화로운 사람이었다.
영화 <카핑 베토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카핑 베토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이상주의 사상가들이 정의한 이상적 개인이 이와 같다면, 이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인류는 어떤 모습일까?

이들은 이상적 인류에 대해 ‘개인의 이상 추구가 개별성을 넘어 보편성을 얻은 상태’로 정의했다. 베토벤과 같은 해 태어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개인의 도덕적 삶이 사회를 매개로 실현되는 이상적 인류공동체의 실현을 탐구했다. 칸트는 인류의 역사를 ‘자연의 계획에 따라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는 세계 시민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실러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인류는 바로 ‘환희에의 송가’에 집약된다. “그대(환희)의 마법은 관습이 굳게 갈라놓았던 것을 다시 묶어./모든 인간은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한 형제가 되도다.” 즉 모든 인간이 한 형제가 되는 공동체로서의 인류다.

이렇게 보면 ‘자유’가 아니라 ‘기쁨’이 인간을 완전하게 한다는 ‘합창교향곡’의 가사도 이상하지는 않게 여겨진다. 이상적인 개인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알고 내면적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인류 전체가 기쁨으로 이뤄진다는 것도 이에 상응하여 맞는 말이 되지 않을까.

결국 합창환상곡과 합창교향곡 두 작품은, 베토벤이 평생 품었던 이상주의적, 계몽주의적 인간관을 비슷한 선율을 이용해 집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개인의 차원, 또 하나는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 형상화한 이상적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공동체 EC는 1985년에 4악장 환희에의 송가 선율을 ‘유럽의 노래’로 지정했고 이것은 오늘날 유럽연합이 이어받고 있다. 이 곡의 자필 원본 악보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왜 매년 12월이 되면 베토벤의 '합창'을 들을까?

유윤종 음악평론가·클래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