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건축에서 칭찬받는 건축으로
야마모토 리켄의 '판교하우징'
이오밍 페이의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친절한 건물, 불편한 건축
오사카의 ‘스미요시 주택(住吉の長屋, 1976)’은 세계적 건축 거장 안도 타다오의 초기작 중 하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권투를 하다가 독학으로 건축을 익힌 사람, 학벌도 경력도 없는 터에 모처럼의 의뢰이니 온갖 솜씨를 부리고 싶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대를 보란 듯이 저버린다.
골목에 면한 집의 정면은 구멍 하나만을 가진 무심한 콘크리트 벽이다. 내부는 더 심하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집을 두 채로 나눠놓아 식당, 화장실을 가려면 비를 맞아야 한다. 안방과 애들 방이 서로 마주 보게 만들어 프라이버시란 없다. 오죽하면 일본건축학회상 심사위원 중 하나가 “이 상은 건축가가 아니라 거주자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까?
좁은 골목에 면한 스미요시 주택의 폐쇄적인 정면 /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렇다면 불편한 이 집은 왜 주목받게 되었을까? 바로 ‘집의 본질’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느 도시주택과는 달리 이 집은 하늘을 집안에 머금고 있다. 설사 비를 맞더라도 집이라는 공간은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식구끼리는 서로 마주 보고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으며 무겁지만 미니멀한 파사드를 통해 집의 내부가 시끄러운 도시 가로로부터 보호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박찬욱과 봉준호의 영화는 불편하다. 피가 낭자하며 미추와 선악이 넘나든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삶의 본질’을 성찰하는 경험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건물 중에 매우 적은 수의 건물은 ‘집의 본질’을 깨닫게 이끈다. 우리는 이들을 ‘건물(building)’과 굳이 구별하여 ‘건축(architecture)’이라고 칭한다.
모든 건물이 건축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스미요시 주택 사례처럼 ‘건축’은 때로 당혹스럽게 만든다. 거주자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는 말은 불편함을 무릅쓰고 건축가의 실험에 동참하여 시대를 가르는 ‘건축’이 나타나게 만든 건축주를 상찬하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처럼 ‘건축’은 훌륭한 건축주에 의해 탄생한다.
인문학으로서의 건축
작년 프리츠커상은 일본의 야마모토 리켄에게 돌아갔다. 우리나라에 있는 두 개의 작품 중 판교하우징은 필자가 대표로 있던 회사와의 협업으로 지어졌다. 그가 그린 초기 스케치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새롭다. 연립주택인데 수평으로 연립하여 한 가구가 3개 층을 쓴다. 더구나 거실은 지하에 두고 1층은 유리방으로 만들어 현관으로만 사용토록 했다.
닫힌 집에 익숙했던 자신들이 처음에는 유리 현관을 거부했으나 “살아보니” 이웃이 만들어지는 장치였다는 것이었다. 이 유리 현관방을 리켄은 ‘시키(閾: 문지방)’라고 불렀다. 집안이면서 외부인 문지방을 투명한 공간으로 만들어 이웃이 개입하고 공유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커먼데크에서 이웃끼리 야외 식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 출처. ArchDaily
‘인문학으로서의 건축’의 반대편에 ‘건설로서의 건축’이 있다. 여기서는 ‘사람답게’ 대신 ‘욕망’이 목적어가 된다. 편하고 친절하여 사용자의 욕망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현시욕을 만족시킬 독특한 외관을 가지면 더욱 좋은 것으로 대접받는다. 하나의 재화로서의 건물이 사용성과 심미성을 지니고자 하는 것이 결코 비난받을 바는 아니다. 문제는 건축주의 욕망에 봉사할 따름인 건물이 건축인 척하면서 ‘건축’을 구축해 버리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 해 5,000여 동이나 지으면서도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우리의 공공건축이다. 현상공모에서 실험적인 건축은 잘 채택되지도 않지만 설사 되더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건설 시대의 덕목을 담은 지극히 기능적인 건물 혹은 단체장의 저급한 취미를 반영한 키치로 둔갑한다. 리켄 자신도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거니와 그가 외국인이 아니었다면 판교하우징도 LH의 등쌀에 일찌감치 훼절되어 그렇고 그런 빌라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텍스트로서의 건축
건축은 건축주의 수준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공공건축은 그 나라의 문화적 수준의 지표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뛰어난 공공건축물을 가진 나라들에는 어김없이 깊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발주자가 아울러 존재한다.
1989년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아 미테랑 대통령은 유럽 문화 수도로서의 파리의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포부로 ‘그랑프로제(Grand Project)' 사업을 개시한다. 그중 하나인 루브르박물관의 새 출입구 설계는 중국계 미국 건축가 이오밍 페이가 맡았다. 계획안이 발표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고전적 건물 앞의 대형 온실이 들어선 격이니, 국보에 대한 설계를 외국인에게 맡겼느니, 마치 100년 전 에펠탑 건립과 18년 전 퐁피두센터 공모 때와 흡사한 논란이 재현되었다. 상식에 도전하는 불편한 건축을 마주해서다.
그럼에도 미테랑은 공모 절차도 없이 선정한 건축가와 그의 설계를 끝까지 지켜주었다. 절차적 공정성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 결과는 다 아는 바다. 루브르를 찾는 누구라도 고전풍의 본관을 유리 피라미드의 배경으로 놓고 사진에 담는다. 페이 안의 어떤 점이 미테랑을 사로잡았을까? 그렇다. 피라미드의 기하학은 루브르보다 더 오래된 조형이되 재료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동체 혹은 시대적 가치를 표상한다는 측면에서 건축은 텍스트다. 이 텍스트를 정교하게 독해하고 그 의미를 역사적 맥락과 시대적 경향을 거울삼아 드러내는 작업을 건축 비평이라 한다. 우리 건축의 저급함과 품격 없음은 한국 건축 비평의 부재와 관련이 깊다. 각종 매체와 SNS에 소위 ‘핫한’ 건축물에 대한 소개 글은 넘치나 그 건축의 인문학적인 독해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전 사회적으로 ‘건물’이 ‘건축’을 몰아내는 기제로 작용한다. 대중들과 상업적 건물주들은 ‘튀는 건물’을 원하게 되고 공공건축의 발주자와 심사자들도 가치 있는 건축보다는 실용적이며 저차원적 상징성을 실은 안을 고른다. 건축가들 또한 자기검열을 통해 실험적 건축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 전통 목조를 콘크리트로 직설적 복제한 청와대나 경북도청사 같은 부끄러운 공공건축이 버젓이 들어서고 프리츠커상 수상자 수가 일본과 한국이 10:0인 이유다.
한때 교포들은 부끄러워 숨어서 먹었다던 김밥이 세계인이 찾는 음식이 되었다. K-문화의 힘이다. 봉준호, BTS처럼 우리 건축도 세계 속에서 자랑스러워질 수 있을까? 1990년대 의대보다 들어가기 어려웠던 건축과 출신들이 이제 젊은 건축가들이 되어 이 땅에서 일하고 있으니 기대해 봄 직하다. 친절한 ‘건물’ 대신 이들에게 불편한 ‘건축’을 허하는 도량 넓은 건축주들이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