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자, <호흡>, 선혜원, 2025. / 사진제공. 선혜원
2025년 가을,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서 전통 한옥 경흥각의 바닥을 거울로 덮은 대규모 설치 작품 <호흡>을 만났다. 아니 그 속에 들어가 모든 감각으로 체험했다. 관객은 거울 위를 걷다가 멈춰 서서 발아래 펼쳐진 천장을 응시하며, 창밖을 내다보며 자신과 공간, 과거와 현재가 반사되는 것을 본다. 완벽한 데칼코마니 속에서 관객은 걸음을 내딛고 호흡하는 그 순간 작품의 일부가 된다. 법적 신분이나 국적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가장 근원적인 리듬은 바로 ‘호흡’이라는 점에서 그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개념미술 작가인 김수자의 10년 만의 서울 개인전이다.
김수자, <보따리>, 2022. / 사진=필자 제공
지하에 내려가니 그녀의 대표작인 보따리 세 개가 어두운 복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빨강, 연두, 분홍 컬러가 촌스러우면서도 한국적이다. 1992년부터 이어진 <보따리(Bottari)> 연작에서 작가는 헌 옷과 침구를 천에 싸서 매듭을 지었다. 그것은 피란민의 짐을 닮았으나, 사실은 기억의 압축이자 존재의 기록이다. 한국전쟁의 행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등에 짊어졌던 보따리는 단순한 짐이 아니라, 가족의 흔적과 생존의 약속을 품은 작은 우주였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수없이 이사했던 그녀의 유년 시절의 추억이기도 하다. 그녀는 1997년 탄생부터 결혼, 죽음까지 사람들의 삶의 중요한 순간을 기념하는 데 사용되는 전통적인 한국의 반짝이는 직물 묶음인 형형색색의 보따리를 실은 트럭 위에 앉아 11일 동안 한국을 여행하며 퍼포먼스 비디오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 (1997)를 남겼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보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소유물이자 과거의 한 묶음”인 동시에 “항상 떠날 채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미래의 상징”이라고 했다.
보따리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떠올린다. 멕시코 국경을 넘는 이주민의 어깨에도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의 손에도 보따리가 들려 있다. 난민 신청이 거부되어 체류 자격을 얻지 못한 이들은 하루아침에 ‘불법체류자’로 호명된다. 어떤 국가는 강경한 국경 통제와 집단 추방을 내세우며, 보따리를 든 사람들을 위협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법이 어떻게 분류하든, 보따리 속에는 소멸할 수 없는 기억과 존엄이 남아 있다. 보따리는 “합법/불법”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존재의 증언이다. 법학자의 시선에서 보면, 이 장면은 1951년 난민협약의 ‘비송환 원칙’과 맞닿는다. 협약은 난민을 박해가 우려되는 본국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약속했지만, 실제 난민 인정률은 극히 낮다. 한국은 2012년 난민법을 제정했음에도 수천 건의 신청 중 인정은 2% 내외에 머문다. 제도가 존재해도, 수많은 보따리는 여전히 문턱 앞에서 풀리지 못한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이 간극법의 최소한과 존엄의 실재 사이를 압축한다.
김수자, <이주하는 보따리 트럭>, 푸아티에 생루이 예배당, 2019. / 사진제공. 김수자 스튜디오
이번 전시에서는 보따리의 사유의 외연이 한층 확장된다. <연역적 오브제-보따리> (2023)는 달항아리를 닮았지만, 입구가 없고 위아래도 없다. 내부는 비어 있으면서 작은 구멍을 통해 안팎이 연결된다.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흐름 속에서 드러난다는 역설이 담겨 있다. 조선 백자의 상징인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독일 마이센 도자기와 협업해 제작된 오브제들은 참 아름다웠다. 맞은편 벽에 전시된 <흙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은 백자토 표면에 수많은 구멍을 뚫어 빛이 스며나오게 했다. 보이지 않는 실이 흙과 빛을 잇는 이 작업은 바느질을 인간과 세계,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행위로 확장한다.
김수자, <연역적 오브제—보따리>, 2023 / 사진=필자 제공
대구에서 태어난 김수자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며, 그 후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999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자발적인 “문화적 망명자”를 자처한 그녀는 이주의 의미와 타자성에 대한 인문학적 인식을 획득했다. 이러한 성찰은 <바늘여인> 퍼포먼스로 이어졌다. <바늘여인>은 보따리의 사유를 몸으로 옮긴 작품으로, 국제적 보편성을 획득한 대표적 작업이다. 도쿄·상하이·런던·뉴욕 등 인구 밀집 도시 한복판에서 등을 보이고 선 작가는 자신의 몸을 바늘로 치환했다. 바늘이 틈을 꿰매는 동시에 찌르고 상처를 남기는 것처럼 국경을 넘어서는 몸은 바늘에 꿰매진 듯 이어지고, 동시에 찔린 듯 상처 입는다. 이주민, 난민, 경계인의 삶은 언제나 이 이중적 감각 위에 놓여 있다. 법은 신분을 정의하지만, 그 정의는 인간의 상처와 존엄을 설명하지 못한다. ‘난민’, ‘불법체류자’라는 용어는 행정적 편의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곧 존재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김수자의 바늘은 이 양면성(보호와 배제)을 몸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바늘을 통해 법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살아 있는 몸’의 경험을 드러내고, 실존의 이중성을 응시하게 만든다.
김수자, <흙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 2023 / 사진=필자 제공
김수자, <바늘 여인>, 2005, 퍼포먼스 비디오, 비디오스틸. / 사진제공. 김수자 스튜디오
한편, 오늘날의 보따리, 이주는 더 이상 비극만을 상징하지 않는다. 유학을 떠나는 학생의 가방, 작품 재료를 챙긴 화가의 트렁크도 또 다른 보따리다. 본래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의 이산, 노예무역, 식민지 시대의 강제 이주처럼 집단적 비극을 지칭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개념은 학업·연구·예술·노동·사랑을 따라 이동하는 자발적 삶까지 품는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 놓여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제13조는 모든 사람에게 국경 안에서의 이동과 거주, 자국을 떠나고 돌아올 권리를 선언했다. 냉전과 탈식민의 격랑 속에서 인간의 이동이 곧 존엄의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헌법 제14조 역시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이 자유에는 국내외 어느 곳으로든 이동하고 거주지를 설정할 수 있는 권리, 해외여행과 국외 이주의 자유가 포함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권리는 언제나 제약을 받았다. 난민과 망명자의 이동은 서류 한 장의 유무에 따라 갈리고, 경제적 이주는 비자 제도의 문턱 앞에서 좌절된다. 오늘날 세계화(globalization)는 이 권리를 다시 변주한다.
한편으로는 국경을 넘어 학업·노동·연구를 추구하는 흐름을 촉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경 통제와 이주 관리 체계를 통해 새로운 배제의 방식을 만들어낸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세계화의 이상 속에서 더욱 보편적인 권리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불평등한 여권 체계와 국경 감시 속에서 그 실현은 더 불완전하다. 예술은 바로 이 간극을 드러낸다. 김수자의 보따리와 바늘, 호흡은 법과 제도가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이동의 경험을 증언하며, 인간이 법을 넘어선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가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도호, <Bridging Home>, 2008, 영국 리버풀. / 사진제공. 서도호 스튜디오
여기서 동시대의 한국 작가 서도호의 궤적이 겹친다. 그는 “현대적 노매드(Nomad)”라 불리며,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작업했다. 그는 한국에서 살던 성북동 한옥을 건물 사이에 끼워 넣듯 설치한 <Bridging Home> (2008, 리버풀)을 비롯해, 하늘에서 추락하는 듯한 ‘낙하산 집‘을 만들었다. 낯선 공간에 적응하려는 노력, 문화적 충격, 그리고 정체성의 고민을 잘 투영했다고 평가받는다. 2024년에는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걷는 집, 기억의 축적”이라는 제목하에 대규모 개인전이 있었다. 반투명 천으로 제작한 네스트 시리즈를 통해 집을 이동하는 건축 공간으로 재현했다. 이 작업들은 낯선 땅에 내던져진 이주자의 처지를,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불시착하는 희망을 은유한다. 법학자의 시선에서 본다면, 서도호의 집은 주소와 신분증이 보장하는 물리적인 건축물인 ‘법적 거주지’와는 달리, 몸이 기억하는 동선으로서의 집을 보여준다. 법은 거주지를 좌표와 권리로 규정하지만, 예술은 집을 이동과 기억의 궤적으로 사유한다.
서도호, <Nest/s>, 2024, 영국 런던 테이튼 모던 / 사진제공. 서도호 스튜디오
2024년 김수자는 파리 피노컬렉션의 로툰다 홀에서 <호흡: 우주>를 선보였다. 돔 천장이 거울 바닥에 반사되며 관람객은 하늘과 우주를 발아래에 두고 걸었다. 한국의 달항아리를 연상시키는 상징은 파리의 중심에서 보편의 우주로 확장되었다. 파사주와 미술관 지하층에 있는 24개의 전시장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정체성, 경계, 기억, 망명, 이동 그리고 직조를 다루는 작품과 영상 설치 작품들로 채웠다. 이러한 그녀의 작업은 디아스포라를 상실의 서사에서 사유와 가능성의 서사로 확장시킨다. 전 세계의 미술계가 김수자에게 환호하는 이유는, 그녀가 한국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류 보편의 감각을 환기하는 작가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저는 로툰다 공간을 어떤 면에서는 한 사람의 본체로 생각합니다. 또한 주변 진열장에 설치된 작품들 또한 어떤 면에서는 별자리이자,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팔과 손가락이 뻗어 있는 모습입니다. 보따리는 인간이 지닌 최소한의 소지품입니다. 우리가 이사하거나 망명할 때, 그리고 전쟁터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따리는 사회적, 정치적 요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대상입니다. 그리고 보따리는 또한 풍부한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요소도 지니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선 예술은 특정한 장소에 묶이지 않는다. 선혜원의 한옥이든, 파리의 로툰다든, 네팔의 거리든, 김수자의 작업은 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어느 나라에 있든, 어떤 제도 속에 있든,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남게 하는가. 그녀의 보따리와 바늘, 호흡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작품은 관객의 발걸음과 숨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법이 만들어낸 경계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 경계 위를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는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이다.
김수자, <호흡-별자리>, 2024. 프랑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 컬렉션 / 사진. Bourse de Commerce – Pinault Collection, Axel Vervoordt Gallery, Galerie Tschudi, Kimsooja Studio
김현진 법학자•인하대 로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