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몰랐던 현대미술의 전설...이불의 철학, 리움이 품다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韓 출신 세계적 현대미술 작가 이불 집중 조명
내년 1월 4일까지
韓 출신 세계적 현대미술 작가 이불 집중 조명
내년 1월 4일까지
그 후 20여년간 이불은 세계 최고 현대미술 작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끊임없이 세계적인 미술관들에서 전시를 열고 신작을 발표하면서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정면 외벽에 조각상들을 장식한 게 단적인 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작가”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국내 대중은 이불의 성공과 위상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다. 세계 최고의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 국내 전시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가 있긴 했지만 초기작 위주였다.
관객 압도하는 ‘비주얼 쇼크’
이불은 어떤 작품을 만드는가. 이 질문에 한마디로 답하기는 쉽지 않다. 다루는 주제가 워낙 넓고 깊어서다.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은 “작가가 아니라 철학자나 사상가로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논문이나 책으로 펴낼 만한 역사적·철학적 주제들을 작품으로 풀어낸다. 전시장 초입에 있는 ‘취약할 의향’(2016)이 단적인 예다. 공중에 떠있는 이 은빛 비행선 모양의 풍선은 길이만 17m에 달한다. 설명 없이도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이 설치작품 안에는 역사적 맥락과 인류 문명의 허망함, 이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이 동시에 담겨 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작품의 모티프는 20세기 초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비행선 ‘힌덴브루크호’. 당시 비행선은 비행기와 경쟁하는 인기 운송 수단이었다. 특히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힌덴브루크호는 인류 기술 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 비행선은 1937년 착륙 도중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염에 휩싸여 추락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 사고로 비행선 산업은 붕괴했고, 힌덴브루크호는 ‘문명의 실패’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배로 치면 타이타닉 호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인간의 실패한 야망을 다루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에 허무주의만 담긴 건 아니다. 천이나 금속 필름 등 가볍고 약한 재료로 풍선을 제작한 덕분에 작품은 공기의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거나 펄럭인다. 이는 생명체의 연약한 피부를 연상시킨다. ‘취약할 의향’이라는 제목처럼, 인간이란 실패를 거듭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면서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지닌 존재다. 이불이 만든 비행선은 그 취약하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 의지를 상징한다. 이렇듯 방대한 내용을 참신하면서도 압도적인 작품에 담는 게 이불의 특징이다.
이불이라는 작가 담은 ‘도서관’
이불이 20대였던 1980년대 후반, 그는 ‘여전사’로 불렸다. 기괴하고 충격적인 퍼포먼스와 조각을 통해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비롯한 한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 이불의 작품세계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범위로 확장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불 작가는 “누구나가 그렇듯 젊을 때는 자신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나이가 들며 관심의 대상이 더 넓어진 것뿐”이라며 “‘여전사’나 ‘한국 작가’, ‘여성주의 작가’처럼 한 단어로 정의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런 작품들이 미술관 두 개 층 공간에 꽉꽉 들어찬 만큼, 전시가 다소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벽돌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의 책장처럼. 하지만 모든 작품의 세부적인 내용을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게 미술관의 설명이다. 거울로 된 내부 공간에서 여러 복잡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벙커’, 넓지 않은데도 안쪽 공간을 한참 헤매게 되는 거울 미로 ‘비아 네가티바’ 등 배경지식이 없어도 새로운 영감과 체험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장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곽 실장은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며 “작품을 본 뒤 자세한 작품 설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QR코드들을 비치했다”고 설명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