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온 우주가 돕는 날
우연히 전해진 타인의 진심
말 한마디에 피어나는 삶
이소연 시인
말 한마디에 피어나는 삶
이소연 시인
불국사 나무 그늘이 푸른 이끼를 키워낸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작은 참새가 탁구공처럼 가볍게 돌아다닌다. 여름이 움직이는 계절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풍경이다. 저녁에는 동궁과 월지를 걸었다. 연못에 핀 연꽃들을 바라봤다. 연잎이 작으니까, 꽃잎도 작았다. 씨방들이 또 한 번 꽃을 피울 것만 같다. 청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흙길을 걸으니 생기가 돌았다.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항동푸른도서관으로 시 읽기 강의를 하러 갈 때도 이런 길을 자주 걸었다. 왕복 4시간 거리에도 지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커다란 햇살이 부서지던 은빛 호수며 나무가 우거진 숲길이 선연하다.
강의 첫 시간에 수강생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모르겠다’와 ‘어렵다’였다. “저는 사실 시에 대해서 잘 몰라서 듣기만 하려고 왔는데요….” 감상을 얘기할 사람을 찾느라 수업 시간이 힘겹게 흘렀다. 내가 느낀 것이 터무니없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시 읽기는 반은 성공이다. 상황을 바꾸는 건 기세라고 했던가? 나는 의지를 다졌다.
“이번 주부터 오른쪽 첫 번째 줄부터는 시를 읽고 왼쪽 첫 번째 줄부터는 감상을 이야기할 겁니다. 그럼 한 번 이상은 다 발표하게 되는 거예요.”
강의실 안이 일제히 술렁였다. 앉은 자리를 확인하고는 걱정하는 사람, 안도하는 사람, 나의 기세에 기가 막혀 웃는 사람들. 약간의 강제성은 도움이 됐다. 한 편의 시에 대해 모두가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선물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은 시를 읽은 감상으로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한 분도 있었다. 김현 시인의 ‘돌 옮겨 적기’라는 제목을 빌려와 쓴 시였는데, 남편에 대한 사랑을 돌에 옮겨 적은 시였다. 낭독이 끝났을 땐 모두가 손뼉을 쳤다.
강력한 마음의 힘에 대해서라면 지하철에서의 일도 생각난다.
“난 꼭 앉아서 갈 거야.”
친구는 내게 사람이 많아서 앉아 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반드시 앉아서 가고 말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희망을 붙드는 순간까지는 살 만하니까. 역시 빈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젊으신데 여기 앉아서 가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내게 자리를 양보한 할머니는 노약자석으로 갔다. 내 얼굴에서 앉고 싶다는 마음을 읽은 것일까? 물론 나는 진짜 앉고 싶었다. 그래도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받을 줄은 몰랐다. 젊으신데 앉아서 가라니…. 참으로 시적이다. 그 말의 힘으로 나는 또 시를 쓴다. 투명하게 나를 비추고, 세상을 비추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다. 할머니는 내 표정에서 흙탕을 읽었을 테다. 흙탕인 젊은이의 마음에서 연꽃 한 송이 피어나라고 조심조심 세상을 내디뎌보라고 그런 말을 했을 테다.
시인 고영민은 철심이란 시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말 한마디’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모난 마음을 둥글려주는 말. 오금 저린 내 그림자를 펴주는 말. 온 우주가 돕는 날은 어쩌면,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오기도 하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