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도쿄는 여행 갈 곳이 못 된다는 게 오랜 믿음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무슨 만화에서 비롯됐다는 ‘7월 대지진설’이 뉴스에까지 나왔다. 친구나 지인들이 ‘정말 갈 거냐’고 흥미롭게 지켜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안 갈 수가 없었다.

임윤찬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몰라서는 아니었다. 이미 한국에서 공연을 본 지인들에게서 들은 얘기도 많았고, 변주곡별로 분석한 외국 콘텐츠도 찾아봤다. DG스테이지 플러스에서 사흘 한정으로 공개했던 카네기홀 연주 실황 영상은 당장 블루레이로 발매해야 될 만큼 훌륭했고, 그걸 (불법) 녹화한 유튜브 영상도 여러 개 봤다. 보고 듣고 읽을수록,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임윤찬은 이미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4번으로 투어를 다니고 있었고, 더 이상 골드베르크 실황을 볼 기회는 없을 줄 알았다.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린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 티켓과 무대 위의 피아노 (7월 7일) / 사진. © 이현식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린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 티켓과 무대 위의 피아노 (7월 7일) / 사진. © 이현식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은 구조도 특이하거니와, 피아노 소리가 정말 예쁘고 정밀하게 들리는 곳이다. 지난해 이른 봄 폭설 내리던 날 임윤찬의 쇼팽 연습곡을 이곳에서 봤는데, 모든 게 녹아내릴 듯한 폭염의 계절에 다시 찾게 됐다. 콘서트는 그 전 연주들에서 했던대로 이하느리의 곡으로 시작했다. 그렇지, 귀를 황홀하게 하는 이 홀의 피아노 음향. 메인 코스를 즐기기 위해 귀를 충분히 예열했다.

바흐의 이 위대한 변주곡 전곡을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경험한다는 건 피아니스트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상당히 버거운 일이다. 몇차례 이 곡의 실연을 봤는데, 그때마다 연주자들은 뒤로 갈수록 고전했다. ‘그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곡은 만만치 않다. 그런데…
7월 7일에 열린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의 프로그램 책자. 일본 기준으로는 나중에 급하게 잡힌 공연이어서 그런지, 공연 포스터는 붙어있지 않았다. / 사진. © 이현식
7월 7일에 열린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의 프로그램 책자. 일본 기준으로는 나중에 급하게 잡힌 공연이어서 그런지, 공연 포스터는 붙어있지 않았다. / 사진. © 이현식
현장에서 본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이미 예습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입이 떡 벌어지는 체험이었다. 그 많은 다양하고도 차별화된 음악적 설계, 그걸 다 소화해내는 테크닉과 에너지, 깊은 몰입에서 우러나는 몸의 움직임, 곡의 흐름이 달라질 때 한 번씩 쉬면서 분위기를 추슬러 결국 거대한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운영의 노련함 등등... 브라보를 외쳐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대체 얼마나 미쳐서 들고 파면 이렇게 연주하게 되는 걸까, 새삼 경이로웠다.

여행도 그렇잖은가. 걸어 다니며 봐야 보이는 경치가 있고, 자동차로 드라이브해야 느껴지는 경치의 맛이 있다. 임윤찬은 변주곡 중 빠른 넘버들을 정말 빠르게 쳤다. 그렇게 하니까 더욱 약동하는 박자감과 살아나는 성부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냥 달리기만 하면 국내외의 많은 애호가와 평론가들이 왜 임윤찬을 천재라 부를까. 언제나 그랬듯, 임윤찬은 그 안에서 새롭게 선율들을 발라내어 귀에 꽂아줬다. 때로는 쳄발로처럼 때로는 관현악처럼 피아노의 음향을 바꿨다. 몇몇 변주에서 고음부를 한 옥타브 올려 칠 때는 마치 별빛이 부서지는 듯했다.

임윤찬은 낭만적 우수와 드라마틱함을 극대화한 25번 변주(var.25)로부터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을 거대한 교향곡의 4악장처럼 그려냈다. 한편으론 쇼팽 에튜드의 대단원이나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같은 느낌이 났다. 30번 변주(var.30)인 쿼들리벳은 민요에서 유래한 선율이라 하나, 이 기나긴 변주곡의 대단원이다. 임윤찬은 그 장대함을 살리고, 드디어 대장정을 마친 자의 희열이 느껴지도록 연주했다.

다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듯한 아리아 다 카포는 숭고했다. 마지막 음을 내려놓는 순간, 우주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와 착륙하는 로켓을 보는 심정이었다. 로켓의 화염이 완전히 사그라지기를 기다려, 함성을 터뜨리며 손이 부서지도록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했던 지진 대신 청중의 환호가 도쿄 오페라시티를 뒤흔들었다.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의 앙코르곡 공지 / 사진. © 이현식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의 앙코르곡 공지 / 사진. © 이현식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연주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바로 앙코르다. 거대한 은하의 중심이 되는 32개의 항성을 지목하듯, 이 변주곡의 근간이 되는 아리아의 32개 베이스라인 음표만 딱 들려주는 짧은 앙코르. 아, 어떻게 이걸 앙코르로 칠 생각을 하지. 음악적으로도 의미심장했지만, 흥분에 들뜬 청중의 앙코르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합니까’라며 진정시키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나가기 전 국내에서의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연주, 지난해 쇼팽 연습곡 전곡, 그리고 이번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임윤찬의 독주 공연을 세 번 봤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건 피아노를 친다기보다 마치 작두를 타는 것 같은 신들린 모습이다. 현장에서 직접 듣는 게 너무나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저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연주회를 끊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드는 것 또한 아무래도 그 때문일 테다.

내 자리에서 머리를 휘날리며 연주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바흐를 무슨 리스트 치듯 치네... 사서 고생이야’ 싶으면서도, 무아지경의 희열에 빠진 그의 표정을 보니 ‘아직은 괜찮은가 보다’ 싶어 좀 안심이 됐다.

이현식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