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중간 생략-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그들의 봄밤은 더없이 어둡다. 술이 술을 먹는 밤. 병이 뼈와 살을 갉아 먹는 밤. 강미자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봄밤>은 벼랑 끝에서 만난 두 사람이 더 깊은 벼랑으로 내려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러나 적어도 함께, 서로를 가슴에 품고 말이다.
이혼 후 아이를 뺏긴 영경(한예리)은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증 알콜 중독자가 되어 살아간다. 철공소를 운영하던 수환(김설진)은 사업 실패로 신용불량자가 되어 병도 치료하지 못한 채 노숙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 둘은 한 결혼식 뒤풀이에서 만난다. 모두가 (술로) 장렬히 전사한 밤, 영경만이 소주병을 들이붓고 있다. 수환은 조용히 그녀에게 가서 술을 따라준다. 그렇게 그들은 만나 하루를 보내고, 이내 서로를 보듬기로 한다.
영화 <봄밤>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류마티스 관절염이 극도로 악화한 수환은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영경 역시 알콜 중독 치료를 위해 그와 동반 입원을 한다. 그러나 영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외출증을 끊어 근처 모텔에 투숙한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다. 그녀의 폭음은 점점 더 심해져서 밖에 머무는 시간은 하루에서 이틀로 이틀에서 사흘이 된다. 그리고 수환은 쉼 없이 그녀를 기다린다. 아마도 돌아오지 못할 그녀를.
이 글 서두의 시는 김수영의 ‘봄밤’이다 (영화의 원작은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를 기반으로 한다). 주인공 영경은 술에 취해 있을 때마다 이 시를 읊조린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이 시만큼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외워낸다. 그럴 때면 수환은 말없이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을 들쳐업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희망도 생명도 없이 사랑만 남은 그들의 어두운 보금자리로.
<봄밤>은 어둡다. 얼마 등장하지 않는 낮 씬도 어둡고, 밤 씬도 더할 나위 없이 어둡다. 강미자 감독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빛을 배제했을 것이다. 이 연인은 생기와 빛을 완전히 소실해 버린 무제(無題)에 가깝다. 그렇다면 무제를 주인공들로 하는 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재앙과 불행과 격투” 끝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불능의 존재가 된 두 사람, 그 공허함 한 가운데를 차지하는 것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처와 세속이 남긴 오명뿐이다. 아이를 잃고 방황하는 엄마, 그리고 거래처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기에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봄밤>의 연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처연하지만 처절하다. 무언가의 시작만큼이나 끝을 함께 하는 것도 그만큼 설레고 치열한 일이다.
영화 <봄밤>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강미자 감독은 데뷔작 이후로 무려 16년 만에 두 번째 작품으로 귀환했다. 데뷔작의 주연을 맡았던 한예리 배우와 함께 말이다. 60여분밖에 안되는 이 짧은 장편은 감독의 16년의 공백을 무색하게 한다. 어쩌면 이 놀라운 작품은 16년의 세월이 반드시 필요했던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픈 존재, 배우 한예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그녀는 이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그녀의 필모그래피 속 인물 중 가장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가녀린 몸과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한예리는 그녀의 커리어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봄밤>의 영경은 단언컨대 한예리가 아니었다면 미완성에 그쳤을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영경은 폭음 끝에 결국 정신을 잃고, 한 병실에서 눈을 뜬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병원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병실을 비롯한 병원 전체가 텅 빈 상태이다. 그녀는 망연자실 주저앉는다.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 벼랑 끝에서 만난 수환까지도... 곧 그녀 앞에 한 소년이 환상처럼 등장한다. 그녀는 울음을 쏟아낸다.
영화 <봄밤>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긍극적으로 영화는 영경과 수환의 만남이 현실이었는지 영경의 환상이었는지 답하지 않은 채 끝이 난다. 혹은 이미 영경은 죽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엔딩에 나오는 소년은 그녀가 그리도 찾던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봄밤>은 시종일관 비참하고 우울하지만 심오하다. 상처로 완전히 잠식당한 존재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경계가 있긴 한 것인가. 강미자 감독의 <봄밤>은 시와 문학이 던지는 상처,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화두를 영화 이미지와 배우 예술로 재해석해 담아낸 작품이다. 그리고 결과물은 각 작품의 뛰어남을 넘어서는 걸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