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 한국의 호텔 비즈니스와 뿔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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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민 롯데벤처스 대표
서울 시청 앞 소공동의 ‘조센호테루’ 도어맨은 ‘작업복 차림’의 그 남자를 쫓아냈다. “조선 최고 호텔에 넌 또 뭐냐”는 투였다. 그 남자, 머리 꼭대기까지 뿔이 났다. 노구치 준, 흥남비료와 수풍발전소를 포함해 대기업 여럿을 소유한 재계의 거물이었다. 뿔이 난 그 남자, 1936년 조센호테루 바로 옆에 훨씬 큰 반도호텔을 지어 깔끔하게 복수한다.
태종이 끔찍하게 아끼던 둘째 딸 경정을 혁명동지 조준의 며느리로 보내며 사저를 지어 주었다고 해서 소공(작은 공주)이라고 불리는 동네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거기다 세웠다. 1914년 일본은 대한제국이 연상되는 그게 보기 싫어 일부를 허물고 고관대작들이 묵을 조센호테루를 지었다. 해방 직후엔 미군이 두 호텔을 사용하다가 한국 정부에 반납했고 한국인 고관대작들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이번엔 대통령이 머리끝까지 뿔이 났다. 정권을 잡은 지 5년이 지난 1966년,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 그 과감한 유치, 2년 만에 개최권 반납이라는 대망신으로 끝이 났다. 경기장도 숙소도, 그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심각한 계산 실수! 진짜 뿔이 난 건 아시안게임위원회였다. “아니, 2년을 앞두고 반납하면 우리더러 어쩌란 거야!” 결국 지난 대회를 열었던 방콕에서 재탕을 할 수밖에. 지난 대회에 엄청난 적자를 본 방콕 시민들은 강제 재탕에 뿔이 났고 개회식에 입장하는 한국 선수단에 야유를 퍼부었다. 결국 한국 정부가 적자의 상당 부분을 갚아줬다고 하니 그런 망신이 다시 없었다. ‘이를 악문’ 대통령은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을 경영하던 관광공사에 똑바로 하라고 닦달했다. 하지만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이 계속 적자만 늘어갔다. 1963년 개관한 워커힐이 있지만 도심에서 멀고 주한미군이 휴가 나오면 거기서 놀면서 달러를 쓰라는 목적이었으니 귀빈에겐 적절치 않았다. 경제 발전으로 바이어들도 계속 오는데 제대로 된 호텔이 절실했다.
껌에서 쇳가루가 묻어 나오는 사고가 터졌다. 생산 설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언론은 난리를 치고, 회장은 단단히 뿔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청와대에서 호출이 왔다. 불같은 성격의 대통령, 신격호 회장은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안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런데 대통령은 껌은 언급도 않고 적자가 점점 커지는 반도호텔을 “신 회장이 인수하고 멋있게 신축해서 운영해보라”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엉겁결에 “제가 호텔을 해본 적이 없어서”라고 말하자 “아니, 신 회장은 날 때부터 제과업 하셨소?”라는 날 선 대답이 돌아왔다. 이러다 얘기가 쇳가루로 바로 이어지겠다는 두려움에 냉큼 알겠다고 했다. 곧바로 “나라에 달러가 부족해서 큰일인데 일본에서 전액 달러를 가져와 지으라”는 사족이 붙었다. 성은이 망극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아, 그놈의 쇳가루!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아시아 최대 규모로 짓자”고 결심했고 일본이 지불한 배상금의 절반에 달하는 1억5000만달러를 일본롯데에서 가져왔다. 이를 악물었던 그 대통령, 신 회장의 퇴로를 차단하려 껌을 씹으면서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그즈음, 이병철 회장도 불려가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려고 일본이 지은 절인 박문사(博文寺) 터에 호텔을 지으라는 강권을 받았다. 그렇게 반강제 반부탁으로 1979년 두 호텔이 나란히 개관했다. 2등을 싫어하던 이 회장은 조센호테루까지 인수해서 규모를 키운다. 초기엔 고객의 97%가 외국인이었으니 달러 공장이 따로 없었다. 외화 부족 국가, 달러를 지불하는 외국인이 최우선이었다. 당시의 호텔? 우리는 문전박대당한 노구치 꼴이었다. 아시안게임을 반납한 선배 세대의 이를 악문 고군분투로 우리는 올림픽과 월드컵도 넉넉히 치러냈다. 이제 호텔은 ‘호캉스’라는 유행어처럼 선진국이 된 우리의 공간이 됐다. 반강제에 당혹했을 두 회장님, 우리 브랜드의 호텔이 해외에도 속속 들어서는 걸 보면 어떤 얼굴을 하실까? 만족을 모르고 늘 급하셨던 두 분, “쪼매 더 빨리 몬하나?”라며 여전히 뿔을 내시려나?
태종이 끔찍하게 아끼던 둘째 딸 경정을 혁명동지 조준의 며느리로 보내며 사저를 지어 주었다고 해서 소공(작은 공주)이라고 불리는 동네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거기다 세웠다. 1914년 일본은 대한제국이 연상되는 그게 보기 싫어 일부를 허물고 고관대작들이 묵을 조센호테루를 지었다. 해방 직후엔 미군이 두 호텔을 사용하다가 한국 정부에 반납했고 한국인 고관대작들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이번엔 대통령이 머리끝까지 뿔이 났다. 정권을 잡은 지 5년이 지난 1966년,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 그 과감한 유치, 2년 만에 개최권 반납이라는 대망신으로 끝이 났다. 경기장도 숙소도, 그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심각한 계산 실수! 진짜 뿔이 난 건 아시안게임위원회였다. “아니, 2년을 앞두고 반납하면 우리더러 어쩌란 거야!” 결국 지난 대회를 열었던 방콕에서 재탕을 할 수밖에. 지난 대회에 엄청난 적자를 본 방콕 시민들은 강제 재탕에 뿔이 났고 개회식에 입장하는 한국 선수단에 야유를 퍼부었다. 결국 한국 정부가 적자의 상당 부분을 갚아줬다고 하니 그런 망신이 다시 없었다. ‘이를 악문’ 대통령은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을 경영하던 관광공사에 똑바로 하라고 닦달했다. 하지만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이 계속 적자만 늘어갔다. 1963년 개관한 워커힐이 있지만 도심에서 멀고 주한미군이 휴가 나오면 거기서 놀면서 달러를 쓰라는 목적이었으니 귀빈에겐 적절치 않았다. 경제 발전으로 바이어들도 계속 오는데 제대로 된 호텔이 절실했다.
껌에서 쇳가루가 묻어 나오는 사고가 터졌다. 생산 설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언론은 난리를 치고, 회장은 단단히 뿔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청와대에서 호출이 왔다. 불같은 성격의 대통령, 신격호 회장은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안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런데 대통령은 껌은 언급도 않고 적자가 점점 커지는 반도호텔을 “신 회장이 인수하고 멋있게 신축해서 운영해보라”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엉겁결에 “제가 호텔을 해본 적이 없어서”라고 말하자 “아니, 신 회장은 날 때부터 제과업 하셨소?”라는 날 선 대답이 돌아왔다. 이러다 얘기가 쇳가루로 바로 이어지겠다는 두려움에 냉큼 알겠다고 했다. 곧바로 “나라에 달러가 부족해서 큰일인데 일본에서 전액 달러를 가져와 지으라”는 사족이 붙었다. 성은이 망극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아, 그놈의 쇳가루!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아시아 최대 규모로 짓자”고 결심했고 일본이 지불한 배상금의 절반에 달하는 1억5000만달러를 일본롯데에서 가져왔다. 이를 악물었던 그 대통령, 신 회장의 퇴로를 차단하려 껌을 씹으면서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그즈음, 이병철 회장도 불려가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려고 일본이 지은 절인 박문사(博文寺) 터에 호텔을 지으라는 강권을 받았다. 그렇게 반강제 반부탁으로 1979년 두 호텔이 나란히 개관했다. 2등을 싫어하던 이 회장은 조센호테루까지 인수해서 규모를 키운다. 초기엔 고객의 97%가 외국인이었으니 달러 공장이 따로 없었다. 외화 부족 국가, 달러를 지불하는 외국인이 최우선이었다. 당시의 호텔? 우리는 문전박대당한 노구치 꼴이었다. 아시안게임을 반납한 선배 세대의 이를 악문 고군분투로 우리는 올림픽과 월드컵도 넉넉히 치러냈다. 이제 호텔은 ‘호캉스’라는 유행어처럼 선진국이 된 우리의 공간이 됐다. 반강제에 당혹했을 두 회장님, 우리 브랜드의 호텔이 해외에도 속속 들어서는 걸 보면 어떤 얼굴을 하실까? 만족을 모르고 늘 급하셨던 두 분, “쪼매 더 빨리 몬하나?”라며 여전히 뿔을 내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