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중앙은행 폐쇄
중앙은행은 정권에 마약과 같다. 기준금리를 정하고, 공개시장을 운영하고, 발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필요할 때 돈을 풀 수단이 된다. 그렇게 정부가 중앙은행을 쥐락펴락하다가 물가가 폭등해 경제를 말아먹은 사례가 부지기수다. 주요 국가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절대 원칙으로 삼는 이유다.

그렇다고 중앙은행 역할을 금리와 통화량 조절로만 제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성장률과 일자리 지표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특히 국지적 금융위기의 세계적 확산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중앙은행이 구원투수로 나서야 할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한국은행도 당초 ‘물가안정’만을 목표로 삼다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2011년 ‘금융안정’을 추가했다.

문제는 그 적정선을 지키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은행만 봐도 그렇다. 정부의 입맛에 따라 휘둘린다고 ‘기획재정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별명이 붙었다가, 통화정책이 정부 정책과 괴리되면 혼자 고고한 척한다고 ‘한은사(寺)’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중앙은행의 역할은 세계 각국의 딜레마다.

그런 측면에서 중앙은행을 폐쇄하겠다는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은 이래저래 주목받는다. 아르헨티나처럼 웬만큼 경제 규모를 갖춘 나라가 중앙은행을 두지 않는 사례는 사실상 없다.

밀레이 당선인의 얘기는 정부가 직접 통화정책의 그립을 쥐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팔라우 등 미국 달러를 쓰는 초미니 국가들이나, 유로를 도입한 유럽연합(EU) 회원국처럼 외부 통화를 쓰는 대신 통화정책을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얘기일까. 그는 실제로 아르헨티나 페소 대신 달러를 가져다 쓰겠다는 뜻을 내비친 바 있다. 아직 뚜렷한 방향은 공표되지 않았지만 ‘중앙은행의 딜레마’를 중앙은행을 없애는 식으로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해 보인다. 경제 상황에 따라 금리와 통화량을 조절해야 할 텐데, 누가 그런 역할과 기능을 대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랜 준비를 거친 EU마저 유로 도입 후 각국의 통화정책을 제한하자 남부 유럽 국가들이 한때 파산 위기에 내몰리지 않았나.

고경봉 논설위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