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은 이 두 가지 미학이 동시에 표출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무대였다. 우선 살펴볼 점은 베를린필 상임지휘자로 지명된 이후 처음 내한한 키릴 페트렌코(51)의 음악적 성향이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언급했다. 감정에 몰입해 도취하는 연주보다 조화와 절제, 기술적인 지시를 통해 최적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게 그의 음악적 이상향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감정은 자연히 따라온다고 했다.
이날 보여준 음악이 그랬다. 첫날(11일)과 달리 이날은 베를린필의 주요 스타 단원들은 물론 스타 협연자 조성진까지 출연한 '풀파워' 무대였던 만큼 그냥 알아서 연주하도록 내버려 둘 법도 한데, 그는 세세하게 소리까지 컨트롤하며 자신이 그린 세부 조감도를 맞춰나갔다.

곡은 이례적으로 피아노가 먼저 주제를 제시하며 시작한다. 조성진은 특유의 우아하고 서정적인 음색으로 문을 두드렸다. 이제 한 식구가 되어서일까, 몇 차례 연주한 작품이어서일까. 이날 조성진은 유독 자신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주저 없이 표출했다. 평소 그의 연주가 양손을 꽉 쥐게 만드는 긴장감이 있었다면, 이날 연주에서는 보다 편안하게 스며들었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자는 다이내믹과 템포를 세밀하게 조율했다. 베를린필의 꽉 차고 비옥한 소리는 협연자의 폭넓은 음색의 스펙트럼을 뒷받침했고, 촘촘한 구조 덕분에 템포와 다이내믹 측면에서 어긋남이 없었다. 2악장에서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사색적인 조성진의 선명한 대비가 이어졌고, 조성진은 충분한 루바토(템포를 자유롭게 연주)와 입체적인 프레이징으로 자신의 음악을 붓질하듯 그려냈다. 3악장에서는 생생한 리듬과 힘찬 타건으로 생동감 있고 유려하게 대미를 장식했다.

호방한 영웅의 기상을 뽐내듯 호른의 웅장한 선율이 돋보이며 초입부가 시작됐다. 이내 온갖 불협화음과 복잡하게 꼬인 반음계,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각 파트 악기들, 파트 별로 다른 템포와 다이내믹 덕분에 전위적이고 일사불란한 느낌을 자아냈다. 페트렌코는 자칫 엉키고 혼잡해질 수 있는 이 대곡을 공학에 가까울 정도로 고차원적이고 심도 있게 조립해 나갔다. 종종 튀었던 금관이나 타악기 파트를 자제시킨 것도 그 일환이었다.
초반부에 금관 파트의 앙상블이 흐릿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현악의 에너지 넘치는 보잉, 유독 풍성하고 묵직한 사운드를 내는 저음 현악 파트, 우레와 같은 금관 파트까지 이들은 음악을 통해 거대한 직물을 짜듯 완벽한 조형미를 완성했다. 특히 이들만의 각 잡히고 탄탄한 이른바 '근육질 사운드'는 무대 끝까지 뚫고 나갈 기세였다.
특히 귀에 들어왔던 건 스타 목관 멤버들의 앙상블이었다. 세계적인 클라리네티스트 벤젤 푹스, '플루트 거장' 엠마누엘 파위, 31년째 수석 오보이스트 알브레히트 마이어 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 파트에서 목관 악기들이 주르륵 튀어나오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들은 긴 호흡과 깊이 있는 음색으로 수십년간 연마한 원숙한 기량을 선보였다.
일류 타이틀은 거저 얻는 게 아니란 걸 보여준 50분이었다. 그럼에도 호불호는 갈렸다. 일각에서는 페트렌코의 지휘가 지나치게 통제적이라 '완벽하지만 감동은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독일 후기낭만주의 대가인 크리스티안 틸레만처럼 감정적으로 전달력 있는 연주가 이 곡에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갓 '베를린필 열차'를 이끌기 시작한 페트렌코가 그려낼 이상향이 궁금해졌다. 그는 완벽주의와 자연스러움 사이 또 다른 차원의 '중용'을 찾을까. 아니면 확실한 완벽주의로 밀고 나갈까.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